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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국민의힘 편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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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1대 국회가 결국 국민연금 개혁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야당 대표가 다 양보하겠다며 연금 개혁을 밀어붙이고, 대통령실과 여당이 다음 국회로 넘기자고 버티는 진풍경을 온 국민이 목격했다. 연금 개혁은 윤석열 대통령의 핵심 개혁 아니었던가.

요즘 정가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해 ‘여의도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퍼지고 있다. 입법 권력을 쥔 거대 야당 대표라는 상황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가 국민연금 개혁 등 민생 이슈를 주도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고 봐야 한다.

여권 무능·무기력·무사명감 젖어
야당 손 내민 연금 개혁 뿌리치고
특검법 부결 위해 민생 법안 외면

이 대표가 “연금 개혁은 이 시대 가장 큰 민생 현안”이라며 여당안(소득대체율 44%) 수용 의사를 밝혔을 때 국민의힘은 허를 찔린 것 같았다. ‘대타협’으로 21대 국회 임기 내에 연금 개혁을 이뤄내자는 이 대표 제안을 불신했었기 때문이다.

그의 개혁 의지가 진심이었는지, 정치적 쇼였는지는 곧 확인될 사안이다. 민주당이 오늘 개원하는 22대 국회에서 말을 바꾸지 않고 연금 개혁에 계속 공을 들이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쪽은 용산과 국민의힘이었다. 대통령과 여당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다. 국민연금 수술이 이 시대 최상위 과제 중 하나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국민연금은 세계 최고 속도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질식돼 가고 있다. 이대로 두면 연금기금은 2055년에 고갈된다. 작년에 태어난 아이가 70살이 되는 2093년엔 무려 2경1656조원의 누적 적자가 발생한다. 매년 약 50조원의 국민 부담이 쌓여간다고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여당과 대통령실은 22대 국회로 연금 개혁을 넘겼다.

여권은 구조 개혁까지 함께 다루자고 한다. 원론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다. 구조 개혁은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연계·통합, 인구구조 변화 등에 따른 자동안정화장치 도입, 공무원연금 개혁 등 연금 제도의 판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내는 돈(보험료율), 받는 돈(소득대체율) 등을 조정하는 모수 개혁보다 훨씬 어렵다는 평이 따른다. 기초연금만 해도 노인층 빈곤 문제와 걸려 있고, 공무원연금은 공직사회의 불만을 마주해야 한다. ‘모수 개혁부터 먼저’나, ‘구조 개혁과 함께’나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동안 국민의힘은 현 정부 출범 이후 구조 개혁과 관련해 어떤 노력을 해왔던가. 당정은 어떤 안을 구상했고, 국민에게 어떤 설명을 했던가. 국민의힘이 여기에 답할 수 있어야 연금 개혁의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다. 지금 국민의힘은 건강이 위험해진 환자의 응급수술을 외면하면서 종합진단 후 수술 방법을 정하자는 몽니를 부리는 것으로 비친다. 그래서 여당답지 않고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혹여라도 연금 개혁이 ‘이재명의 개혁’으로 각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면 더욱 집권당 자격이 없다. 민생보다 치적 관리가 우선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 여권은 무능·무기력·무사명감의 ‘3무(無)’에 젖은 기색이 역력하다. KC 미인증 제품 해외직구 금지 같은 무능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정책 실패야 있을 수 있다 치자. 정작 나쁜 것은 집권 세력으로서의 사명감 부재다.

그저께 여당은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돌아온 ‘채 상병 특검법’을 부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검법 부결을 최우선에 두고, 민생 법안들이 걸려 있는 상임위 회의를 보이콧했다. 그 바람에 많은 민생 법안이 폐기됐다. 그래놓고 민생을 중시한다는 집권당이라고 할 수 있나.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진다”는 말이 있다. 역사는 그런 사례로 가득하다. 국민의힘은 앞으로 그런 형국에 처할 소지가 다분하다. 국민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를 한층 엄중하게 주시할 것이다. 이제 연금 개혁이 늦어지는 책임의 상당 부분은 국민의힘이 떠안게 될 것이다. 시간은 국민의힘 편이 아니다. 안일한 여당만 그것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