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헌기가 소리내다

국회의장을 당원 뜻대로 뽑자? 그게 정당정치 망치는 지름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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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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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선출 결과가 열성 당원의 뜻과 다르게 나타나면서 당내에서 후보 선출 과정에 당원의 뜻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픽=정근영 기자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선출 결과가 열성 당원의 뜻과 다르게 나타나면서 당내에서 후보 선출 과정에 당원의 뜻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픽=정근영 기자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당원 중심 정당’이라는 개념을 두고 홍역을 앓았다. 열성 민주당원이 원하는 후보는 추미애 당선인이었는데 정작 우원식 당선인이 선출됐다. 적잖은 민주당원들은 소속 국회의원들이 당원을 무시했다며 반발했다.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이후 민주당 당선인 워크숍 결의문에선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당원 표심을 일정 부분 반영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라는 게 명분이었다. 타당한 주장일까.

당원과 의원 역할 구분해야 #유권자는 의원에 선출 위임 #당원 의견, 당론에 반영해야

 헌법상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래서 국가의 모든 정책을 국민투표로 정하자고 하면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실천되는 국정 운영일까. 정부는 국정 운영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야 하고 의회도 민심을 대의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와 의회가 단순히 ‘다수 민심’을 그대로 옮겨서 집행하는 기관인 건 아니다. 정부는 ‘당장 다수가 욕망하는 것’보다 더 복잡다단한 국가의 작동을 놓고 정책의 타당성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따져야 하며 책임도 져야 한다. 의회는 다수에 속하지 않는 국민의 의사도 대변해야 하고, 각기 다른 국민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사회적 합의를 창출해야 한다.

유권자는 당원에게 위임하지 않았다  

 정당은 어떨까. 국가가 단순히 행정부와 국민으로만 이루어진 결사체가 아니듯 정당도 지도부와 당원으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V. O. 키 주니어에 따르면, 정당이란 세 가지 주요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첫째는 ‘유권자 속의 정당(party in the electorate)’이다. 정당의 핵심 기능 중 하나가 유권자의 정치적 선택을 단순화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제가 되는 것이란 이야기다. 실제로 정당의 위상과 규모와 권한 역시 당원 수로 정해지지 않는다. 집권 여당이 되느냐, 제1당이 되느냐 등은 당원이 아니라 유권자가 만들어준다.

 정당의 주인이 국민인지 당원인지 논쟁하자는 게 아니다. 유권자는 헌법상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에게 국회의장 선출권을 위임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이 다수이니 사실상 이들이 권한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이 민주당에 가입한 일부 국민에게만 국회의장을 직접 선출할 권리를 위임하겠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둘째 ‘조직으로서의 정당(party as organization)’이다. 정당은 중앙당 지도부와 전국 권리당원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당 안쪽으론 각종 위원회, 당 밖으로는 각종 연대체들이 종으로 횡으로 연결돼 있다. 가령 당내 노동위원회와 당 밖 노조가 연계되어 있을 수 있고, 당내 지역위원회와 그 지역 유권자들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런 연계가 잘 이뤄질수록 유권자의 지지가 확장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데 정당을 당원 중심으로 운영하는 게 만능이라면 이런 정당 활동 개념이 다 무슨 소용일까.

 마지막으로 ‘정부 내의 정당(party in public office)’이다. 정당이란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국정 운영에 참여하거나 혹은 정부를 견제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을 운영하는 당 대표와 별도로 의원들의 총의를 모아 정책을 조율하는 원내대표를 따로 두고, 국회의 상임위마다 실제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상임위원장과 간사를 둔다.

 원내대표는 당의 의사를 반영하되 실질적으로는 정당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의회(정부)의 일을 수행하는 직책이다. 국회 운영위원회를 제외한 모든 상임위원장직은 당 지도부나 주요 당직을 맡은 사람이 겸직하지 않는 관례가 있는 까닭이 뭐겠는가. 형식적으로라도 공정하게 상임위를 운영하고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당에서 ‘당정분리론’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컨대, 흔히 대통령을 두고 여당의 제1호 당원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여당 당원들의 총의만 반영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장은 다수당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회의장의 의무와 역할이 그저 다수당 당원들의 총의를 반영한 국회 운영인 것은 아니다. 역할과 취지가 전혀 다른데, 거기서 당원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건 억지다.

왜곡된 당원 중심주의, 정당 정치 위기 불러

 국가의 모든 일을 국민투표로 처리하고자 하면 국민 중심 정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정당이 개입해야 하는 모든 공적 영역의 일들을 당원 투표로 결정하자는 발상은 당원 중심 정당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 정치를 형해화하는 지름길이다.

 오히려 당원 중심성을 강화해야 하는 영역은 따로 있다. 당론 채택이나 정당의 운영 부분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한국의 정당은 당론을 정할 때 당원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하지 않는다. 이견을 표출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징계까지 받는 게 당론인데, 정작 이를 정할 때는 소수의 고위 당직자들끼리 정하고 형식적으로만 의원 총회에서 추인받는 식이다.

 애초에 당원들이 민주적으로 정당 운영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해 토론하거나 정당 활동을 폭넓게 할 수 있는 (대의) 기구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니까 개별적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거나, 집회에 찾아가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탈당계를 내는 것 말곤 의사 표시를 할 길이 없지 않나.

 정작 당원 중심이어야 할 정당 운영은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당론이나 정당 운영이란 테두리를 벗어나는 국회의장 선출은 당원들의 참여를 고려하겠다고 한다. 말만 당원 중심 정당이지 실제론 정당 정치 자체를 해체하고 있는 셈이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전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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