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시진핑이 불안하다? 실패 부른 '택일' 뒤 미묘한 균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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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돌아간 북한의 27일 위성 발사 '택일'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불만이 묻어 있다. 이날 이뤄진 한·일·중 정상회의에서 3국이 '협력의 제도화'에 한목소리를 내며 북핵 문제를 의제로 다룬 건 북한의 '뒷배'를 자처해온 중국이 한·일과 부쩍 가까워지는 데 대한 김정은의 초조함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28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 실패 뉴스를 지켜보는 모습. 뉴스1.

28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 실패 뉴스를 지켜보는 모습. 뉴스1.

中도 들어갔는데…"정면 도전"

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리창(李强) 중국 국무원 총리가 이날 정상회의 결과 채택한 3국 공동선언에 대한 북한의 날선 반응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는 이를 "자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며 반발했다. 중국이 정상급에서 채택한 문안을 북한이 정면으로 반박하는 건 이례적이다.

앞서 지난 16일에도 박명호 북한 외무성 부상은 왕이(王毅)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의 초청에 따라 이뤄잔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방중 직후 "구걸 외교"라고 비판하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에는 중국이 아닌 한국만 저격하며 수위를 조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이 주도하는 국제회의 마당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적 지위를 부정하는 엄중한 정치적 도발이 감행됐다"며 사실상 이에 참여한 중국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이날 3국 공동선언에는 "우리는 역내 평화와 안정, 한반도 비핵화, 납치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각각 재강조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북한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3국이 명확한 접점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도출된 현실적 타협안이었다.

이에 기존 문안보다도 후퇴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는데,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른바 조선반도(한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 유지,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운운하는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며 이 역시 문제삼았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중국도 참여한 정상급 결과물에 포함된 것 자체가 북한에는 충격인 셈이다. 이는 중국 역시 북핵 문제 논의에 함께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 문구에 충격 

실제 중국이 지난해부터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뒤통수를 맞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중 장관회담에는 외무성 부상이 나서 반발하면서 한·일·중 정상회의에는 외무성 대변인이 반응한 것도 일부러 격을 낮춰 불쾌감을 표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통일부 당국자는 "중국이 참석한 정상회의에 대해 북한이 공개적으로 비난한 건 이례적"이라며 "앞선 사례로는 박근혜 정부였던 2015년 9월 한·중 정상회담에 대해 비난했던 게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로 관계가 틀어지기 전인 2014~2015년 무렵 이뤄졌던 한·중 간 '허니문'을 김정은이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마음에 두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당시 시 주석은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했다.(2014년 7월)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다 중국으로 반환된 자이언트판다 '푸바오'의 엄마 아빠인 '아이바오'와 '러바오'도 당시 시 주석이 선물을 약속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의 70주년 전승절 행사에도 직접 참석했는데, 당국자가 언급한 2015년 한·중 정상회담이 이때 이뤄졌다.

윤석열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대통령실.

중국이 지난 4월 북한에 공산당 서열 3위인 자오러지(趙樂際)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보내고 이번엔 한국에 서열 2위인 리창(李强) 총리를 보낸 것도 이를 기억하는 김정은의 불안감을 자극했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6~17일 방중했을 때 북한을 함께 찾지 않은 것과 관련, 북한이 중국을 탓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당시 일부 외신은 푸틴의 '깜짝 방북'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외교 소식통은 "동선으로나 부담을 더는 측면으로나 푸틴으로서는 중국을 방문하며 돌아오는 길에 방북하는 방안이 나쁘지는 않은 선택지였다"며 "하지만 러시아 정상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다른 나라를 경유, 집중도가 분산되는 데 대해 중국이 거부감을 보였을 수 있다"고 전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왼쪽)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지난 13일 (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회담에 앞서 인사를 하는 모습. 외교부.

조태열 외교부 장관(왼쪽)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지난 13일 (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회담에 앞서 인사를 하는 모습. 외교부.

담화 내고 위성 쏘고…반발 몸부림

한·일·중 정상회의 공동선언에서 "3국이 유엔 안보리 이사국으로 (올해) 함께 활동한다. 유엔 안보리 등 다자 간 협력 체제에서도 긴밀히 소통할 것임을 재확인한다"고 명시한 건 김정은으로서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북한 전체 대외 교역량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이 제재 이행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제재를 지키는 시늉만 해도 북한엔 치명타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27일 밤 10시 44분 평안북도 동창리 일대에서 소위 군사정찰위성을 쐈지만 공중 폭발하며 실패했다. 사진은 NHK가 공개한 영상 일부로, 북·중 접경 지역에서 북한이 쏜 발사체가 폭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이다. NHK 화면 캡처.

북한은 27일 밤 10시 44분 평안북도 동창리 일대에서 소위 군사정찰위성을 쐈지만 공중 폭발하며 실패했다. 사진은 NHK가 공개한 영상 일부로, 북·중 접경 지역에서 북한이 쏜 발사체가 폭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이다. NHK 화면 캡처.

앞서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북한 노동자들이 아프리카와 중국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하며 "북한은 지난해 여름 왕래를 해금했지만, 귀국한 북한 노동자보다 새로 중국에 입국한 노동자가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며 "중국이 수용에 신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것 아니냐"는 외교 소식통의 관측도 인용했다.

북·중·러 프레임에 직격타 

이번 3국 정상회의를 통해 더욱 확연해진 최근 한·중 관계의 개선 흐름은 '한·미·일 대(對) 북·중·러'라는 신냉전 구도를 고착화해 존재감을 키우려던 김정은으록선 뼈아픈 결과다. 한 전직 정부 고위 당국자는 "한·미·일 협력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주도하지만, 북·중·러 협력이 되려면 북한이 이를 끌고 가야 하는 말도 안 되는 구조"라며 근본적 한계를 지적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 평양 순안공항에서 방북을 마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환송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 평양 순안공항에서 방북을 마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환송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실제 중국은 그간 선 넘은 북·러 밀착에 거리를 뒀을 뿐 아니라 최근 들어선 미·중 경쟁 구도를 의식해 한·일 끌어당기기에 매진하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중국 관영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 영문판인 글로벌 타임스)는 이날 3국 정상회의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대중국 정책이 합리적으로 복귀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전방위로 진화하는 한·미·일 협력이 오히려 중국으로 하여금 한·일에 다가서도록 하는 동력이 된 셈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를 고착화하려고 했던 북한의 계산이 망가지고 있다"이라며 "북한의 노골적인 반발은 최근 북·중 관계에 균열이 생겼단 뜻으로 향후 양국 관계가 다소 경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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