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네”“죽은 줄 알았나” IMF 터진 후 YS 뜻밖의 모습

  • 카드 발행 일시2024.04.04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박태준 회고록’ 디지털 에디션을 시작합니다

중앙일보의 인물 회고록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2004년 8월부터 12월까지 90회에 걸쳐 박태준(1927~2011) 전 포스코 명예회장(32대 국무총리)의 현대사 증언을 연재했습니다. 박 전 회장은 한국의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인 포항제철을 모래밭에서 일궈낸 세계적 ‘철강왕’이었습니다.
지난 회에선 군인에서 기업가가 된 박태준이 왜 박정희의 정계 진출 권유도 마다하다가 1980년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었는지를 다뤘습니다.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이후로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5명의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신군부 체제에서 ‘반(半)자발적’으로 정치권에 들어선 그가 이번 회에선 자신의 정치 역정을 짧게 술회합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과 맺은 정치적 관계와 그들에 대한 인물평입니다.

‘음성다중방송’ 노태우의 정치 화법

1990년 1월 5일 필자(오른쪽)는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대표위원 임명장을 받았다. 중앙포토

1990년 1월 5일 필자(오른쪽)는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대표위원 임명장을 받았다. 중앙포토

1989년 성탄절 무렵, 프랑스 파리로 해외출장가 있던 나에게 포스코 회장비서실 업무를 관장하는 이대공 부사장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이 부사장은 안기부장 (현 국정원장) 비서실장에게서 온 극비 연락이라면서 노태우 대통령이 민정당 대표를 맡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전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딱 잘랐다.
“이 사람아, 내가 정치하고 싶어서 국회의원 하고 있나? 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네가 무슨 소리야. 나는 정치를 본업으로 할 생각이 없어. 고사한다고 전해 주게.”

90년 새해 벽두, 파리를 떠나 미국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이 부사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같은 내용이었다. 파리에서 뉴욕까지 거듭되는 전화에 짜증을 부리면서도 속으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행했던 아내가 “저쪽에서 대통령의 뜻을 세 번이나 전해 왔는데 직접 전화라도 하는 게 예의가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애가 탄 이 부사장이 나 몰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한마디 거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결국 ‘저쪽’에서 직접 걸려온 전화를 받은 나는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1월 5일 귀국했다. 취재진을 헤치고 청와대로 직행해 노 대통령과 점심 식탁에 마주 앉았다. 억지로 맡았더라도 일단 여당 대표직을 수락했으니 가장 궁금한 사항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합당 얘기가 빈번히 오간다고 하는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직 아무것도 된 게 없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런가 했다. 내심 합당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전국구 의원인 나를 대표로 기용한 배경에는 장차 합당하면 거여(巨與)를 조화롭게 잘 관리해 달라는 뜻도 있을 터였다. 나도 그런 정도의 역할은 해야 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세간에서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장관의 보고는 달랐다. 합당은 다 되었고, 서명만 남았다는 거였다. 과연 그랬다. 그로부터 고작 보름 만에 3당은 합당했다. 나는 노 대통령에게 기분이 상했다. 일을 맡기고도 처음부터 허심탄회하게 나오지 않은 점이 내 방식에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언론에선 노 대통령의 정치적 언술을 ‘음성다중방송’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도 더러 그렇게 했다. 1992년 정초였다. 민자당 대선후보가 공개적으로 거론될 때였다. 그가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독대였다. 신년 덕담이 오간 뒤에 그 특유의 음성다중방송이 나왔다. “박 선배께서는 왜 운동을 안 하십니까?” 나는 얼른 알아차렸다. 민자당 대선후보 경선 운동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게 한다고 되는 겁니까?” 나의 반문에 그는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며칠 뒤, 노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YS·JP와 나를 배석시켜 놓고 ‘민주적 경선’을 천명했다. 내가 이 말을 믿고 경선에 나서려 하자, YS는 물론 노 대통령까지 큰일날 것처럼 반대했다. 결국 경선을 포기해야 했다. 나는 노 대통령과 달리 정치적 복선에 익숙지 않은 체질이었다.

언제였던가. 일본에서 지인들과 정계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엔 우쓰미 기요시란 분도 있었다. 미쓰비시상사를 크게 키우고 후지코카콜라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의 견해는 이랬다.

“일본도 그렇지만 어느 나라든 정계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잡다한 요소가 많고, ‘더티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밀실 거래는 다반사다. 한국도 같을 것이다. 그런 세계가 박태준의 인품에 맞을까? 경제인으로서 당신이 보여준 행보가 정치에서는 통용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집권 여당 대표위원에 취임했다. 명색이 권력 서열 2위였다. 하지만 훨씬 소중한 대역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양제철소 4기 종합준공이 2년9개월 남은 시기였다. 어느 기자가 회장직 유지 여부를 묻기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포철이 92년까지 생산량 2100만t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 사임 문제는 그때쯤 생각할 것이다.”

집권여당의 관리에 협조하면서 광양제철소가 완공되면 최고경영자 자리도 후배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 1990년 새해의 내 인생 설계였다.

YS 측의 배신… 참을 수 없는 모욕감

1992년 10월 10일 민자당 최고위원이었던 필자는 광양제철소 영빈관을 방문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左)와 어색한 모습으로 악수를 했다. 중앙포토

1992년 10월 10일 민자당 최고위원이었던 필자는 광양제철소 영빈관을 방문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左)와 어색한 모습으로 악수를 했다.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