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사건,무리수사 안돼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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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경찰이 왜 이러나. 화성부녀자 연쇄살해사건 용의자로 조사받은 30대 목공이 정신착란증세를 보인 끝에 자살하고,피의자로 지목돼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무고한 시민이 속출하는 가운데 범인이라고까지 발표했던 윤모군은 경찰에 끌려간 지 닷새 만에 처음 공개된 장소에서 온몸을 떨며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자백」을 번복하고 있다.
어떻게 피해자 진술조서를 멋대로 꾸미고 증언을 만들어 내며 심지어는 변호사 접견내용까지 조작할 수 있는가. 도대체 경찰은 왜 이러는가. 우리는 윤군의 범행 여부를 지금 단계에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경찰이 연역적으로 그를 범인이라고 설정해 놓고 꿰어 맞추는 수사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는 수사행태를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찰이 아직도 무슨 수를 쓰든 자백만 받아내면 된다는 구시대적 자백제일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임의성 없는 자백은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가혹한 방법으로 일단 범인을 조작하고 난 뒤 법정에서는 어떻게 되든 관여할 바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가공할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증거를 찾는 과학적 수사가 아니라 자백을 받아내는 강압 수사가 통용되는 한 경찰은 국민에게 보호자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경찰은 귀납수사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주변의 가능한 모든 사람을 끌어다 놓고 범인으로 만들려는 무리를 범하지 말라. 「범죄와의 전쟁」의 상징적 사건이 되다시피한 이번 사건을 해결하려는 경찰의 의욕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 의욕이 법정에서는 어떻게 되든 우선 평가를 받아 놓겠다는 한건주의식 발상으로 연결된 무리수사로 나타난다면 국민의 안녕을 지키는 경찰이 아닐 국민의 공포의 대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용의자로 조사받은 30대 목공의 자살을 보면서 우리는 경찰이 이번 사건의 혐의자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윤군은 며칠 동안 범행을 추궁받은 뒤 기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온몸을 떨며 횡설수설했다지 않은가.
이미 경찰은 증거없는 「범인」을 세 명이나 만들었다가 검찰과 법원에서 무혐의나 무죄로 풀려나게 한 불명예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증거와 증언이 모두 깨진 상태에서 경찰은 윤군이 범인이란 집착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지금부터라도 경찰은 발상을 전환,피해주변수사로 돌아가 단서를 찾고 물증과 증인을 추적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그 자체도 의심스럽지만 「자백」에만 매달려 법정까지 끌고 갔던 「엽기사건범인」이 무고한 시민으로 판가름난다면 경찰은 사건을 해결 못 한 무능에 더해 도덕성마저 상실하는 사태가 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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