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로 중국관리 구워삶은 미 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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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회사 전용기를 동원한 해외 시찰, 상하이의 초고가 아파트 선물, 베르사체의 고가 의류에다 캐논의 고급 카메라. 그것도 부족해 가족 동반 유럽 여행까지….

투명성을 강조해 온 미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이권을 따내기 위해 현지 은행장을 뇌물로 구워삶은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29일 보도했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베이징에 소재한 컨설팅 회사(그레이스 앤드 디지털 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가 올해 미국 플로리다에 소재한 소프트웨어 기업(피델리티 서비스 인터내셔널)을 상대로 플로리다 주법원에 낸 소장에서 드러났다.

이 컨설팅 회사는 "2001년 1억7600만 달러 상당의 건설은행 보안 소프트웨어 구매 계약을 성사시켜 주는 과정에서 왕쉐빙(王雪氷) 당시 행장과 그의 가족에게 뇌물을 제공했는데 5800만 달러의 컨설팅 수수료를 피델리티가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구매 계약과 관련해 뇌물이 오간 사실이 2000년 초 중국 당국에 의해 적발되고 계약이 중단되면서 사건이 소송으로 비화됐던 것. 소장에 따르면 뇌물 목록에는 명품과 상하이의 33만 달러짜리 아파트가 포함됐다. 이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파리.로마.라스베이거스 등지로 호화 여행을 시켜주고 캘리포니아의 페블비치에서 골프 라운딩도 주선했다.

이 사건으로 왕 행장은 이듬해 12월,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동안 구체적 뇌물수수 행태는 공개되지 않았다.

소장에 따르면 피델리티의 뇌물 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왕 행장 해임 뒤 새로운 로비스트를 고용했고, 후임 장언자오(張恩照) 행장과 가족에게 다시 뇌물 공세를 폈다. 2005년 3월 개인적 이유를 내세워 사퇴한 장 행장 역시 피델리티.히타치.IBM.NCR의 대리인으로부터 50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이달 초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피델리티는 장 행장이 미국 출장 때 회사 전용기를 내주고 아들의 테니스 클럽 비용도 대납한 것으로 전해졌다.

원고 측 변호인은 "사업상 이득을 취하기 위해 국외에서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 제공을 금지한 미국법을 피델리티가 명백히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 측 변호인은 "정당한 영업비용을 지급했을 뿐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현재 미 법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이 사건에 대해 별도로 수사를 진행 중이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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