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 스스로 할 일부터 먼저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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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정치협상회의'를 제의했다.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는 판에 대통령이 여야 대표를 불러 의견을 듣고 국정에 반영하겠다는 것은 고무할 일이다. 그럼에도 이번 제의에는 정말 임기 말 국정 표류를 걱정해서 내놓은 제안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전효숙씨 문제는 협상 카드로 쓸 사안이 아니다. 전씨는 노 대통령의 욕심과 절차상 실수로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청와대가 협상 카드로 제시하는 바람에 전씨의 사퇴는 기정사실이 돼 버렸다. 그런 사석(捨石)을 활용해 야당을 공격할 요량이라면 떳떳지 못하다.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야 할 전씨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도저히 취할 방도가 아니다. 차라리 전씨 문제를 먼저 깨끗이 정리한 뒤 이런 제안을 했다면 오히려 조금은 더 진실하게 보였을 것이다.

청와대가 지지부진하다고 걱정하는 사법개혁안과 국방개혁안, 내년도 예산안 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도 전씨 문제부터 털어내는 게 순서다. 구체적인 내용이야 정치협상으로 풀 일도 아니고, 여야 원내 대표와 실무협상자들이 수시로 협의해야 할 일이다.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은 정치협상회의에서 거국중립내각도 논의하자고 했다. 임기를 1년 남짓 남겨놓은 이 시점에 구성되는 내각은 사실상 임기 말까지 가는 선거관리내각이다. 그런데 도지사 선거에 나가 유권자의 표로 떨어진 사람을 선거관리와 지방행정을 책임지는 행자부 장관에 임명한 게 바로 나흘 전이다. 그런 오기 인사를 한 지 사흘 만에 거국내각을 논의하자니 무엇이 진심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야당이 청문회에서 반대한 이재정 통일, 송민순 외교부 장관 문제도 이 실장의 설명에서는 재검토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노 대통령은 정치에서는 손을 뗄 시점이다. 열린우리당마저 떼어놓으려 하는 마당이다. 그런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여야를 향해 국정협의가 아닌 '정치협상'을 하자고 나서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