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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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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고지식한 앨 고어'가 할리우드 배우가 됐다. 그가 주연한 환경 다큐멘터리가 대박을 터뜨렸다. 지구 온난화를 다룬 '불편한 진실'의 흥행 수입이 2000만 달러를 넘었다. 다큐멘터리로는 사상 네 번째라고 한다. 같은 제목으로 낸 책은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올랐다. 기세에 그는 200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뜻도 슬쩍 내비쳤다.

2000년 대선에서 그는 부시보다 표를 더 많이 얻고도 졌다. 재대결은 그의 권리였다. 그러나 2004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미래'보다 '과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이유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한번 실패한 후보는 대개 물러난다.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다시 하면 잘할 것 같은 생각이야 왜 없겠는가. 그러나 두 번은 몰라도 삼세판 나선 사람은 민주당의 윌리엄 브라이언이 유일하다. 그는 세 번째도 실패했다.

앤드루 잭슨은 퀸시 애덤스를 이겼지만 과반수를 못 얻어 고배를 마셨다가 다음 선거에서 설욕했다. 닉슨은 케네디에게 졌지만 8년 뒤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부통령 후보로 나가 떨어진 뒤 대통령 후보로 직접 나서 내리 4선을 했다. 레이건은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에서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다.

한국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병'이란 비난까지 받아가며 3전4기한 게 대표적이다. 나올 때마다 '뉴 DJ'를 외쳤다. 1971년 7대 대선에 나선 뒤 87년 평민당 총재가 될 때까지, 길게는 97년 대선까지 그는 '김 후보'로 불렸다. 시인 고은이 "…떴다 봐라/정의당 당수/코밑의 팔자수염…"이라고 노래한 진복기씨도 빼놓을 수 없다. 진씨는 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 꼭 한번 출마했다. 그 뒤 97년까지 선거 때마다 북을 울리다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등록은 하지 않는 '만년 대통령 후보'였다. 김포의 김두섭 전 의원은 여덟 번 만인 14대에 당선했지만 국회의원 출마병에 패가망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삼세판 출마설이 솔솔 나온다. 이미 두 번이나 국민의 심판을 받았으니 돌아올 명분 만들기가 만만찮다. 왜 다시 평가 받아야 하는지, 여당 후보들을 이미 훌쩍 앞선 다른 야당 후보들로는 왜 안 되는지 설명해야 한다. 두 번씩이나 거부한 유권자가 흘러간 옛 노래에 돌아설 리는 없다. 새 레퍼토리가 필요하다. 잘못하면 '87년판 양 김씨', 광대의 즐거움을 준 진복기만도 못한 그 뭔가가 될 수도 있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