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증후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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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 하기도 힘들지만 '전직 대통령' 하기도 힘들다. 한국같이 민주주의 전통이 짧은 나라에서는 전직 대통령들에게 역할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없어 더욱 그럴 것이다. 목포에서 '호남 없이 한국 없다' '나는 전라도 사람으로 살다 전라도 사람으로 죽겠다'는, 중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말을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을 대통령 할 준비를 했으면서 전직 대통령의 역할이나 처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목포 발언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 평화상을 받아 세계적 지도자로 자처하던 자신의 이미지에 스스로 먹칠을 했다. 그의 퇴임 후 증후군(Post-power syndrome)은 심각해 보인다.

현직일 때보다 전직 대통령으로 더 빛을 발하는 사람이 미국의 지미 카터라 하겠다. 그는 1994년 평양으로 달려가 김일성을 설득해 일촉즉발의 핵 위기 해결 실마리를 찾아줬다. 그는 세계를 구석구석 누비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탯 운동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아시아.중동.중남미.아프리카에서 여러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래서 카터는 대통령 지내지 말고 처음부터 전직 대통령이었으면 더 좋을 뻔했다는 조크까지 등장했다. 미국의 또 다른 전직 대통령들인 빌 클린턴과 아버지 부시가 구원(舊怨)을 씻고 세계의 재난 지역을 함께 찾아다니면서 구호활동을 돕는 모습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물론 외국이라고 모범적인 전직 대통령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9년, 그때까지의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51세의 나이에 퇴임했다. 대통령직에 도전할 나이에 그는 대통령을 졸업했다. 1906년에는 러일전쟁의 종전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1912년 루스벨트는 정계 은퇴 공약을 뒤집고 공화당의 진보세력을 업고 대선에 출마했다. 그의 후임자인 윌리엄 태프트의 노선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게 그의 정치 재개의 핑계였다. 공화당 지지표는 현직인 태프트와 루스벨트로 분산돼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에게 당선의 어부지리를 헌납했다. 루스벨트는 언론활동과 아프리카에서의 사파리 사냥으로 여생을 보냈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포스트 파워 신드롬을 초인적 인내심으로 다스린 사람의 전형이다. 그는 1862년 황제 빌헬름 1세의 재상으로 임명돼 1890년까지 28년간 재임하면서 전설적인 세력균형정책으로 독일을 유럽의 중심국가로 만들었다. 1888년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친정(親政)체제를 구축한 뒤 보수적 사회정책으로 사민당과 대립하는 비스마르크를 해임했다. 권력을 잃은 비스마르크는 자주 함부르크 시내 브로트슈랑엔가에 있는 쾰른스-아우슈테른 운트 후머슈투벤이라는 레스토랑에 나가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젊은 황제가 비스마르크 자신의 정책 틀을 하나하나 허물어 나가는 데 대한 불만을 삭였다. 비스마르크는 그 식당에서 독일제국을 유럽 열강들과의 충돌 코스로 몰고가는 빌헬름 2세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논설을 구상해 함부르거 나하리히텐 신문의 기자에게 구술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 이상의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을 보지 않고 죽은 것은 행운이었다.

전직의 '끗발'은 공공자산이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통령 지망생들은 부디 정치 선진국의 전직들이 퇴임 후 어떤 생산적 활동으로 국민과 인류에 봉사하는지 연구 좀 했으면 좋겠다. 김대중과 이인제를 닮은 루스벨트는 반면교사로, 카터와 부시와 클린턴은 사표(師表)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퇴임 후 서울에만 눌러앉아 정치판을 기웃거리지 말고 노무현 대통령이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낙향해 사는 모범을 보일 수는 없는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