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선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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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양의 겨울은 서양보다 45일쯤 빠르다. 기온의 변화로 계절을 실감하는 서양과 햇볕의 길이를 계절의 척도로 삼는 동양과의 차이다.
중국문화권의 달력은 춘분,하지,추분,동지,2지2분으로 되어 있다. 동양의 춘하추동은 바로 「분」과 「지」의 중간에서 시작된다. 겨울의 초입은 추분과 동지의 중간인 입동,봄은 동지와 춘분의 중간인 입춘이 기점이다.
그러나 서양의 4계는 2지2분에서 시작된다. 이 시점의 계절은 대체로 피부의 느낌과 일치한다. 겨울의 추위와 봄의 따스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때 겨울이고 봄이다. 기분을 앞세우는 동양사람의 계절감각하고는 다르다.
요즘은 생활환경에 따라 계절의 또다른 척도가 있다. 백화점이나 상가들은 한여름의 중간쯤에 가을 상품을 내놓고,가을은 아직 절정에도 이르지 않았는데 한겨울 상품들을 진열한다. 현대의 생활은 이처럼 시간을 재촉하며,또 시간에 쫓기며 나날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요즘 자연을 발견하는 작은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어지럽고 숨막히는 서울의 한 복판에서 길을 걸으며 낙엽을 밟는 기분은 상쾌하다 못해 이상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그 작은 낙엽 하나가 주는 감회는 여간 반갑고,여간 진솔하지 않다. 자연에 얼마나 굶주리며 살면 그럴까 하는 서글픈 생각도 하게 된다.
지난해 서울시는 무슨 영감이 떠올랐는지 11월 어느날을 정해 「낙엽의 날」을 선포한 일이 있었다. 이틀 동안 가로수의 낙엽을 치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각박하고 이악스러운 관청에서 이권도 아닌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로맨틱한 궁리를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올가을엔 아직 그런 얘기가 없다.
아침 출근길에 청소하는 사람들이 빗자루로 나뭇잎을 털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어느 길목에선 나무줄기를 맹렬히 흔들어대며 낙엽을 재촉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들에겐 낙엽이 성가시고 귀찮은 쓰레기일 뿐이다. 정취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는가 보다.
파리나 런던에선 가로수의 낙엽을 치우는 일이 없다. 일손이 모자란 탓은 아니다. 시민들에게 자연을 선사하는 마음에서다. 가을은 이제 끝물이고 입동도 지났는데 낙엽이라도 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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