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병|이혜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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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라디오를 틀자 방안 가득 음악이 울려퍼진다.
풀숲을 감돌며 흐르느 시냇물처럼 음악사이사이에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톤이 높고 푸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솔길같은 이야기와 물결처럼 넘쳐나는 선율에, 덩달아 기분좋은 일을 하나 만들고 싶은 아침이다.
지금 밖으로 나가 가을햇살이 비추는 시골의 코스모스 꽃길을 걷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색연필을 모아 예쁜 엽서를 꾸미고 누구에겐가 이렇게 편지를 써보는 것도 이 가을 홀로있는 시간의 내밀한 기쁨이 되리라.
식탁위에 향기로운 차 한잔을 놓고 음악을 들으며 편지를 쓴다.
겨울을 예감하는 귤 얘기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할 수 있었던 러셀의 용기 등을 적어본다.
그러나 노벨상을 아직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에선 다소 노벨문학상에 허기져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주지를 않는군요.』하는 아나운서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어딘가에 몇편의 글을 띄어놓고 「이제나 저제나」심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심사발표날짜가 다가올수록 자신없는 마음엔 초조감만 쌓여가고, 친구들은 하나 둘 짝을 지어 가을여행을 떠났다.
혼자 다니지 말고 제발 짝좀지어 다니라는 어머니의 성화가 심하지만 언제나 혼자 다니고 싶어하는 내 성격을 고치기 어렵다.
기침 소리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가을 아침에 결실의 내일을 위해서 책을 읽고 글도 쓰며 여행도 떠나야겠다.
지난번 수해를 극복하고 어지러운 나라사정도 좋아지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충북 천원군 성환읍 대홍리 427의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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