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글이 바로 서려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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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내 나라의 말과 글이 남의 나라 말과 글에 눌려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고 자유로운 언로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할 민주사회가 아직도 일부나마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늘이다.
믿고 따라야 할 공직자ㆍ정치가들의 말이 믿음과 도덕성을 잃은 채 겉과 속이 다른 말이 오가는 불신의 사회가 되었다. 말과 글의 주체성과 민주화,그리고 신뢰성이 허물어져가고 있는 오늘이면서도 한글날은 다가오고 각종 기념식과 행사는 예년에 비해 더욱 다채롭기만 하다.
『아아,가갸날/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와요/축일 제일 데이 시즌 이 위에/가갸날이 있어요.가갸날…』 1926년,조선어연구회가 한글날의 전신인 「가갸날」을 선포했을 때 만해 한용운이 쓴 축시의 일부다.
「축일 제일 데이 시즌」이라는 외국어 위에 우뚝 솟아나기를 축원했던 민족시인의 염원이 오늘의 우리 현실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밤의 도심을 비추는 휘황한 네온사인은 영어글자로 명멸하고 있고 뜻모를 상표 옥호가 거리의 광고판과 신문ㆍTV에서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마치 이름모를 이국도시의 한복판에 서있는 느낌이다.
굳이 국제화시대 속에서 국수주의적 주체성을 내세우자는 게 아니다. 그만큼 세계 속의 한국을 외치고 살았으면 이제라도 한국 속의 한글을 소중히하고 자랑할 줄 아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새롭게 생겨나는 내수용 상품들이 꼭 뜻모를 외국어야 하고 외국어가 표기되어야만 손님이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고만 있는 것인가.
언로를 막고 감시했던 권위주의시절의 그 숱했던 유언비어는 곧 권력이 말과 글을 장악했을 때 일어났던 또다른 형태의 민족수난사 였다. 일제의 감시와 통제 아래 굴절되었던 우리말 우리글이 같은 민족에 의해 통제되고 감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떠한가. 다방과 술집 심지어 택시 속에서 오고간 말들이 감시체제에 의해 기록되고 보관되어 시민의 말과 글을 위협한다면 일제와 독재의 악폐가 지금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자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셈이다. 그것이 민주화시대의 언로와 표현의 자유일 순 없다.
말로는 민주화를 외치고 선거 때면 온갖 공약을 남발하고 당과 개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한번 뱉은 말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우리 말과 글을 신뢰성과 도덕성을 더욱 무너뜨리고 있다.
한글날 5백44돌을 맞는 오늘,겉모습만 번지르한 현란한 기념행사에 도취할 때가 아니다.
외래어 홍수에 파묻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우리 말 우리 글의 주체성을 살릴 각오를 다시 할 때다. 우리 말 우리 글을 관이 통제하고 감시하는 그물체제를 벗겨야 할 때이고 자신의 말과 글에 책임질 줄 아는,말의 신뢰성을 높여야 할 때다.
말과 글의 주체성과 민주화,그리고 신뢰회복이 각별하게 요청되는 때에 우리는 한글날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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