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단풍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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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 가을에 단 한번이라도 붉게 타오르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온 산이 물드는데,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고 불쌍하지요. 적과의 동침이 아니라면 어찌 이 가을에 타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손을 움켜쥐면 주먹이요, 펴면 단풍잎입니다.

손바닥에 새겨진 엽맥들은 한 그루 나무의 추억. 그대의 손금이며 지문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속으로 가고 또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뭇잎이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쌍하거나 불행하지 않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지요. 그대는 화살나무로, 나는 붉나무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입니다. 세속적인 사랑이 서로 잘 모르는 것이라면, 증오는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것이니 꼭 한번은 타올라야지요.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봄이 와 축축히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 마디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어 새싹이 필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 몸 속에 다시 나이테 하나 새겨집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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