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조-아프리카의 눈(장정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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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그것은 쓰르라미 왕매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 저녁나절이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아물아물하는 두 시인과 어울려, 익산에서 보화공주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을 찾아 모주 한잔 붓고 돌아오던 길에, 벼이삭 패는 논 물꼬에서 두세 마리 물고기가 게으른 헤엄을 치는 것을 보았다.
그들도 흰자위 검은 동자로 우리를 흘끗 보고 있었다.
그것은 겨울 바람 차가운 아프리카 남단이었다.
대서양 푸른 물결이 케이프만 모랫벌에 허옇게 부서지는데, 손발이 얼어붙는 테이블산 정상 바위틈에는 자주빛 알로에 꽃이 만발해 있는데, 그 곁에서 한 흑인이 흰자위 검은 동자로 우리를 흘끗 보고 있었다.
그것은 30여년 전 익산의 물꼬에서 본 그 물고기 눈이었다.

<시작메모>
뒤꼍 아카시아 나무에서 우는 매미소리를 무심코 듣고 있노라니 젊은 시절의 한 작은 에피소드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도망치려는 그 상법의 꼬리를 붙들고 잡아당기니 숱한 사연들이 실꾸리 풀리 듯 끝없이 풀려 나온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환상의 천을 짜내는 것이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다. 그것은 초현실적 현실이자 초 논리적 논리이면서 동시에 초 인과적 인과이므로 다만 표현이 있을 뿐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었던 지난날의 사소한 몸짓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 같은 나를 내가 놀라는 요즘이다. 그것을 담담한 이야기로 엮어 나가 보리라 하는 첫 시도가 이것이다. 「글쎄올시다」라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다.
■약력
▲1928년 정읍 출생 ▲원광대학교·국문과. 고교 교사, 출판계를 거쳐 집필 생활 ▲1957년 문단 데뷔. 중앙시조 대상수상 ▲작품집『백색부』『묵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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