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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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길고 긴 피서행렬도 끝나가고 있다. 하루사이에 달라진 새벽의 선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올여름은 유난히 길고 지겨웠다. 긴 장마와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올여름처럼 더위속에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숨김없이 노출되었던 해는 없었다. 고속도로에 쏟아져 나온 자동차들의 피서행렬은 경제성장의 대견한 광경도,중진국 시민의 자랑스러운 모습도 아니었다.
그것이 무슨 묘기라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새치기,옆치기,앞지르기를 일삼는 자동차들,그 뜨거운 아스팔트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멱살잡이로 싸우는 어른들,그것을 머쓱하게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아이들. 설마 그 아이들이 『우리 아빠,이겨라』하고 속마음으로라도 응원했을 것 같지는 않다.
피서지에 닿아서는 그보다 더한 일들을 부지기수로 보고 경험해야 한다. 우선 악덕상인은 어디서나 보는 일이고,발길에 채는 것은 쓰레기와 불결한 환경이다.
뭇사람들이 노는 바닷가나 개울가에 수박 껍질쯤 던지는 것은 예사중의 예사이고,생선 내장을 후벼서 그대로 물속에 던지는 것을 죄스러워하는 사람도 보기 드물었다.
경기도 광주 천진암 가는 계곡의 개울가에선 이른 새벽부터 화투판을 벌여놓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동네 마이크에선 개울에서 빨래하지 말라는 경고를 귀가 따갑게 하지만 아이들은 그 개울물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설악산 계곡에선 돌멩이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자연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돌멩이마다 쓰레기를 짓눌러놓았기 때문이다. 과일 찌꺼기 썩는 냄새,언제 없어질 것 같지도 않은 비닐주머니들,깡통과 유리병,우유상자 껍질,나무젓가락,라면 찌꺼기….
밤이면 귀를 찌르는 마이크와 카셋 소리,고성방가,다투고 싸우는 소리,눈 돌리기도 민망한 남녀 젊은이들의 작태.
그런 여름을 보고 느끼며 피서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차라리 이런 여름은 없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2세들에게 여름은 보여주고 가르쳐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여름이여,길고 긴 여름이여,어서,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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