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선량의 「말」 붙잡아 「역사」로 기록|국회 속기사 이대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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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속기사는 이색 직업이지만 생긴지 오래고 종사자수가 극히 제한되어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요즘 열리고 있는 국회본회의 대 정부 질의에서 하루동안 의원·장관들이 발언하는 「말의 양」은 평균 9호 크기 작은 활자로 인쇄된 4×6배판 70쪽 분량. 빠른 속도로 허공에 퍼져 가는 이 「말」들을 붙잡아 「역사」속으로 고정시키는 작업이 속기사가 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 속기사의 수는 약 2백50명. 법원·총무처·은행·국영기업체 등에 고용돼 있으나 가장 많은 80명이 국회 직원이다.
국회 공무원 6급인 이대숙씨 (33·여)는 『인간이 긴장할 수 있는 최대 한계에 속기사는 매일 도전한다』고 직업 속기사로서의 직업관을 밝힌다.
『발언자의 흐리는 말끝, 참석자들의 회의장 출입,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의사 진행 발언, 장내 소란 등 회의장 분위기를 감각으로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는 그는『숨소리까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집중력이 속기사에 요구된다』고 말했다.
회의장에서 곡선과 직선을 배합하고 각 선의 위치·각도·길이를 조정해 발언을 노트에 「그려 넣으면」 속기사는 자기 방으로 와 다시 암호 같은 속기 글을 일반 문자로 풀어써야한다.
기본 속기 문자가 있지만 속기사는 자기 식의 기록 습관이 있는 데다 획의 뻗침 각도가 10도만 달라도 뜻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속기사에게 「번문」을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저한 자기 책임제다.
『힘들긴 하지만 매력이 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서의 보람이지요.』
김재규 재판 때 『속기를 배워둘걸 그랬다』는 기자들의 푸념을 잡지에서 보고 전문적 여성직업으로 선택했다는 이씨는 81년 국회에 들어오자마자「의령 우순경 총기 난사 사건」 「이철희·장영자 사건」「명성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다룬 회의에서 일을 하면서 『진실이 파헤쳐지고 이를 기록하는 희열을 맛보았다』고 말한다.
국정 감사 청문회 전두환씨 증언 때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속기와 번문으로 숱한 밤을 보낸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일의 집중성·전문성에 비해 보수는 비교적 약하다는게 속기사들의 불만.
9년 경력의 이씨가 받는 월 보수는 세금 공제전 액수로 약 60만원. 업무의 특성상 충분히 받음직한 수당도 없어 이에 대한 고려가 있었으면 하는게 속기사들의 바람이다.
『일 자체의 보람, 근성과 프로 정신이 있어야 하는 업무의 성격, 남녀 직원의 완전한 평등 보장이 속기사의 매력이죠. 특히 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그는 지방 자치제가 실시돼 각 시도·시 군구 등에 2백70여 의회가 생기게 되면 속기사의 수요가 급증하는 데다 앞으로 속기 전산화 작업까지 진행되면 속기직의 앞날은 매우 밝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매년 3월에 뽑는 국회 속기사 양성 코스 (40명)나 서울 등 20여개 사설학원에서 1년쯤「각고의 고생」을 하면 1급 속기사 자격을 딸 수 있으며 1∼2년에 한번씩 보는 국회 속기 공무원 시험에 응할 수 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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