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중독 탓" 유제두 주장 상세보도

중앙일보

입력

<속보> 1976년 일본 와지마 고이치에게 패배한 것은 중앙정보부의 약물 공작 때문이었다는 전 주니어미들급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유제두(60)씨의 주장을 29일 보도했던 광주일보가 30일 자 신문에 그의 주장과 근황 등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다음을 30일 자 광주일보의 관련 기사 전문이다.

<30년 전인 1976년 2월 17일 밤 8시. 온 국민은 TV를 주시하고 있었다.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챔피언인 유제두와 일본의 와지마 고이치 간의 리턴매치가 시작된 것이다. 국민들은 당연히 유씨의 승리를 예상했다. 이미 유씨가 와지마를 일방적으로 몰아 KO로 이겨 챔피언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 내내 유제두는 무기력했다. 15라운드 내내 주먹한번 제대로 뻗지 못한채 패배했다. 그 한스런 패배를 놓고 항간에는 '약물중독설'과 '매수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패배 이후 30년만에 그가 처음으로 당시의 일을 털어놓았다.

"1981년엔가 우연히 알게 된 목포 출신 후배 S가 찾아와 '형님 그날 딸기 드셨지요. 그 속에 약을 넣었다고 하던데요'라고 한 말을 듣고 그 날의 억울한 패배에 대한 의문이 모두 풀렸어요"

지난 24일 오후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의 태양권투체육관에서 유제두(60)씨를 만났다. 악수하는 손의 힘이 대단했다. 주먹은 돌처럼 딱딱했다.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유씨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일한다는 S로부터 76년 패배 이후 불거진 '약물 중독설'의 내막을 듣고 바로 청와대.대검.치안본부 등에 수사해달라는 진정을 했다"며 "하지만 다음날 정보부에서 온 사람을 따라 '남산'으로 갔고 그 자리에서 꿇려 앉아있는 S를 봤다"고 말했다. 유씨는 "S로부터 그 자리에서 '형님에게 한 말 모두 거짓'이라는 말을 들은 뒤 돌아왔고 S는 직장을 잃게 됐다"고 덧붙였다.

S씨의 말을 종합한 유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국권투위원회 위원장은 증앙정보부장 측근으로 당시 패배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71년 고향 선배의 소개로 알게된 김대중 선생한테 매년 명절 때 인사갔었다. 세계챔피언 따고도 청와대에 인사한 뒤 동교동에 간 것을 당시 정보부 요원에게 들켰다"며 "그런데 만약 2차 방어전에 승리, 또 동교동을 찾아가고 이것을 언론에서 떠들면 박 대통령이 싫어할 것 같아 정보부에서 미리 나의 승리를 막는 과잉충성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S가 딸기 이야기를 했을 때 생각이 나지 않았으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날 아침에 체중을 재고 나서 옆에서 돌봐주던 사람이 내게 딸기를 줘서 먹었다. 그 뒤 곰탕을 한그릇 먹고 나서 자고 일어났는데 그때부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즉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아서 유씨의 주변에서 저지른 일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에게 딸기를 줬던 사람은 검찰에서 조사까지 받았지만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유씨는 때문에 후배 S의 양심선언을 설득했으나 '형님 이젠 잊어버리고 사십시오'라는 말만 들었단다.

그는 또 "그날 패배 이후 재기를 노리고 열심히 연습했으나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세계타이틀전을 주선해 주지 않았다"며 "언젠가는 임재근(당시 동양주니어미들급 챔피언)과 동양미들급 챔피언인 나에게 둘이 싸워서 이기는 사람한테 세계챔피언 도전권을 주기로 하고 경기를 해서 7회 KO로 이겼는데도 도전권은 임재근에게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씨는 인천에서 벌어진 세계타이틀전에서 졌다.

물론 이후로도 그에게는 세계 도전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은퇴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79년 8월 56전 51승(29KO)2무3패의 기록으로 11년의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21차례 동양타이틀 방어기록은 아직도 살아있다. 은퇴하면서 타이틀을 반납했다.

고흥에서 태어난 그가 권투 글러브를 처음 낀 것은 고등학생이던 1964년. 처음엔 태권도를 배우고 있었는데, 여수에서 온 사범이 권투 가르치는 것을 구경하다 남성적인 매력에 빠져 잠시 배웠었다.

"1966년 부모 몰래 서울로 왔지요. 권투를 하고 싶었거든요. 쌀 한가마 판 돈 2천800원을 들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지요."

돈은 금방 떨어졌고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고물장수, 구두닦이 등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체육관에 운동하며 권투를 배웠다. 그러다 68년 프로로 전향했으며 군 입대 후에도 윤필용 당시 수경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권투를 계속할 수 있었다. 71년 동양챔피언에 올랐고 바로 세계챔피언 도전 의지를 밝혔으나 와지마의 거부로 시합이 성사돼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75년에야 지명으로 도전권을 따냈다.

그해 6월, 당시 27세의 유씨는 와지마 고이치를 7회KO로 눕히고 한국의 두번째 세계챔피언(주니어 미들급)이 됐다. 김기수 이후 7년만의 세계챔피언 탄생일 뿐 아니라 일본 선수를 상대로, 그것도 적지에서 이긴 경기였기에 국민의 감격은 더욱 컸다. 더욱이 유씨는 1차 방어전에서도 일본의 마사코 마사히로를 6회 KO로 물리쳤다.

그러나 그는 2차 방어전에서 패배했고 3년 후 은퇴했다. 유씨는 79년 은퇴경기 후 후진 양성에 힘써 왔다. 침체된 프로복싱을 살려보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 결과 84년 IBF(국제복싱연맹) 챔피언에 오른 장태일을 비롯해 곽정호 차남훈 장영순 정선용 등 동양챔피언을 길러냈다.>

유씨는 1946년 고흥군 두원면 신송리에서 태어나고, 고흥중.고를 졸업했다. 71년 7월 미들급 동양챔피언,1975년 6월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올랐으며,79년 8월 은퇴했다.56전 51승(29KO) 2무 3패.

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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