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온라인 게임 잠재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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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전설.민담에서부터 연극.소설.오페라.뮤지컬.만화.영화까지 인류사의 모든 이야기는 '작가가 만든' 것이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일단 작가가 이야기를 창조했고 독자는 사후에 그것을 듣고 보고 읽어 왔다. 게임기로 하는 콘솔 게임 역시 이런 '작가 이야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96년 세계 최초로 온라인 게임을 상용화한 한국인은 이러한 '작가 위주' 서사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동일한 주제의 긴박한 이야기가 1만 시간 이상 전개되며,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독자가 등장 인물인 동시에 작가로서 이야기를 만드는, 놀라운 서사물을 실제로 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4년 5월 9일 붉은 혁명 혈맹이 기란성을 기습 점령하고 모든 세금의 철폐를 선언하면서 시작된 '리니지2'의 바츠 해방전쟁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이야기는 폭정을 일삼던 지배혈맹이 2006년 5월 21일 해체될 때까지 743일 동안 연인원 2000만 명의 관심과 참여 속에 전개됐다.

게임 속 가상공간에는 언제 접속해도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이 있고, 매일 매일 새로운 사건이 있다. 또 서로의 자유롭고 평등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고, 지키기 위한 투쟁이 있다.

이는 한국의 온라인 게임 문화가 IT 기술과 한국 전통문화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국인은 혁신적 수용자로서 누구보다 빨리 디지털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그 속에 현대와는 아주 거리가 먼 향촌공동체 문화를 부활시켰다. 전화도 없는 작은 마을에 살며 매일 만나 따뜻한 마음을 나누던 '마실 문화'의 시대.

피곤하고 여유 없는 오늘의 삶에 지친 한국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 존재했던 그 시대의 따뜻한 온기를 그리워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저녁마다 동네의 어느 사랑방으로 마실 가던 과거의 관행을 가상공간 속으로 옮겨왔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이 가상공간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상상력과 문화적 창조력을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온라인 게임은 게임성과 재미가 대단히 뛰어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 발생한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1895년 프랑스인이 영화를 발명한 것에 필적하는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온라인 게임은 게임의 미래이며, 미래의 인간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만들어낼 거대한 사회적, 서사적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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