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인문학 위기, 부흥의 호기로 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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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의 '9.15 선언'에 이어 전국 80여 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이 인문학 위기 타개를 위한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빈사(瀕死)의 인문학계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처절한 비명이다. 위기란 말조차 낙관적으로 느껴질 만큼 국내 인문학은 오래전부터 구조적 붕괴가 진행돼 왔다.

과거 '학문 중 학문'으로 일컬어지던 문학.사학.철학은 많은 대학에서 퇴출됐거나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이른바 '돈 안 되는' 학문으로 학생한테서 외면받고, 교수들은 학생들이 몰리는 실용학과로 전과를 강요받고 있는 실정이다.

인문학 연구 지원은 더욱 절망적이다. 지난해 서울대 인문.사회과학대학에 수탁된 연구비는 200억원으로 공대의 5분의 1밖에 안된다. 서울대니 그 정도다. 정부의 인문학 분야 지원은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0.73%에 불과하다.

실용학문이 흐르는 강물이라면 인문학은 지하수에 비교된다. 지하수가 고갈되면 차츰 강물도 마르고 뭍 생명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된다. 당장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인문학을 팽개치면 사회 발전은 물론 산업경쟁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도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영어로 옮길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분명 일리가 있다. 정부와 대학 당국은 이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인문학계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한 체질 개선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20년 전 강의노트는 사라져야 한다. 안존하는 태도를 버리고 현실과 길항(拮抗) 관계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이번 위기가 인문학이 제자리를 찾고 학문의 균형적 발전을 이루는 기회가 되길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