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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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귤'- 김기택(1957~ )

노인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여 있다.

며칠 전에 딸이 사놓고 간 귤

며칠 동안 아무도 까먹지 않은 귤

먼지가 내려앉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귤

움직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작아지는 귤

작아지느라 몸속에서 맹렬하게 움직이는 귤

작아진 만큼 쭈그러져 주름이 생기는 귤

썩어가는 주스를 주름진 가죽으로 끈질기게 막고 있는 귤

어두운 방 안에 귤 놓여 있다.


계속해서 이 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끝내 물기가 다 빠져나가 버려 색이 변하는 귤. 점점 쪼그라들어 탱자만해지는 귤, 그리고 이내 미라가 되고 곰팡이가 피어오르리라. 그 사이 창으론 햇빛도 다녀가고 계절도 다녀갈 것이다. 어느 날 경찰차가 도착하고 갑자기 집은 아연 활기를 띨 것이다. 환한 조명을 든 카메라 기자들도 올 것이다. 검은 봉투만 남긴 귤을 찍으러. 동네 개들이 짖을지 모른다. 새로운 기법의 레퀴엠처럼.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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