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비전향 장기수 다룬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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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어쩌면 반(反)시대적인 영화일지 모른다. 가볍고 경쾌한 영화만 선호하는 요즘 풍토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라니, '분위기 파악 못하는' 영화 아닌가. 더구나 역사 의식이 과거의 유물이 돼버린 지가 언젠데….

그래서 '선택'은 오해를 많이 살 만하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수십년간 자유를 포기한 불굴의 인간들을 그렸다면 고지식하고 경직되지 않을까, 공범자라는 죄의식 때문에 극장을 나설 때 무거운 짐을 진 듯 부담스러워지지 않을까 등등.

하지만 영화는 이런 선입견을 쉽게 잠재운다. 유머와 눈물,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90% 이상 감옥이 배경임에도 다양한 각도로 변화를 주어 시선이 지루하지 않다. 극장에 불이 켜지면 관객은 비전향 장기수든, 전향을 한 이든, 그들을 괴롭혔던 간수든 모두가 분단이 만든 희생물이며 그래서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선택'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에 한 점 손색이 없다.

영화는 45년간의 감옥 생활로 기네스 북에 최장기수로 기록될 정도였던 김선명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25년생인 그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지원했다 유엔군에 생포된다.

이후 전향서만 쓰면 출옥시켜 준다는 회유와 협박.고문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속일 수 없다'며 비전향 장기수로 있다 70세 되던 95년 석방됐다. 그러나 당시 94세였던 노모는 그를 만난 두 달 후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의 외면 속에 외로이 살아가던 김씨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2000년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과 함께 북송된다.

영화는 김씨가 주인공이지만 김씨는 부표처럼 떠 있고 그 주변을 스쳐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좌익수 전담 반장으로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빨갱이'에 원한이 사무친 오태식(안석환), 깡패 잡범으로 수감돼 교도소 측의 사주로 비전향 정치범에게 폭력을 일삼다 '단맛만 빨리고' 용도폐기되는 고상구(임일찬), 가족들이 받는 고통 때문에 결국 전향하는 종달이(고동업) 등. 김선명 역의 김중기를 비롯해 최일화.김종철 등 연극 배우 출신들의 연기도 탄탄하고 안정돼 있다.

6년간 시나리오를 다듬고 제작비 댈 곳을 못 찾아 오랫동안 방황해야 했던 홍기선 감독.'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92년) 이후 10년만의 신작에서 그는 그 오래 묵힌 시간만큼이나 숙성된 영화를 만들어냈다. 제작비가 여의치 않아 한겨울 장면인데도 입에서 김이 나오지 않는 등 세련되지 못한 결함이 띄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사상에 반대하지만 그 사람의 사상이 탄압을 받는다면 그 사람 편에 설 것이다'라는 볼테르의 금언을 영화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홍감독은 고생한 보람이 있다.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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