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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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I
붓 갈데 안 갈 데를 분별조차 못하면서
마구 휘둘러 놓은 파지 직전의 그림 한폭.
내 마음 걸쳐 낸다면 아 이런 형국 아닐는지.

먹물에 싸인 여백들이 더욱 희게 보이는 순간
뼛속에 와 소리치는 깨우침 하나 있다.
물 안든 나머지 마음 그거나마 잘 닦으라는.

<시작메모>
나는 영아를 보면 마주 앉거나 엎드려서 장난을 건다. 아기에게 10원짜리 동전 한닢을 주면 아기는 손가락을 옴질거리며 그걸 받는다. 나는 다시 다른 동전을 준다. 아기는 쥐었던 것을 놓고 받는다. 그걸 계속 되풀이한다. 아기는 그때마다 쥐었던 것을 놓는다. 참다 못해 아기 엄마는 『아기 힘드니 그만 하라』고 나무란다.
20년이상 불경을 읽으면서 마음 공부를 해오는 나에게 이 일이 예삿일이 아니다. 눈앞에서 빤히 가르쳐주는 스승을 보고도 마음은 캄캄절벽이니 경은 읽어 무엇하겠는가. 알듯알듯한 이 묘한 이치를 나는 정말 깨칠 수 없을 것 인가. 생각이 이에 이르면 불경은 말한다. 「깨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 털끝만한 집착이 있으면 삼천대천 세계도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절망하고 만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일어나 내 마음의 움직임을 엿보려고 한다. 설사 허망한 짓거리라 해도 나는 심법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확인되고 체득되는 마음이라는 관념 세계를 어떻게 시적 공간에다 끌어 앉힐 것인가 하는 것이 내시의 한 과제이기도 하다.
■약력
▲1941년 대구출생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당선 ▲1986년 제3회 만해불교문학상 수상 ▲시집『허공 그리기』『못다 부른 정가』 ▲오늘의 시조학회 부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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