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의 정치술(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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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고르바초프는 지난 며칠동안 세기적인 정치쇼를 보여주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전체회의가 이처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예는 없었다.
흥미있는 것은 미국쪽이다. 키신저의 말을 빌리면 부시정부는 행여 고리(고르바초프의 애칭)가 실각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불안,초조해 있었다. 만일 고리가 권좌에서 밀려나면 다음 92년 미국 대통령선거는 보나마나라는 것이다.
민주당진영이 『고리는 어디갔나』하고 외치면 부시대통령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속으로 『고리,힘내라』하는 응원을 소리없이 했다.
그러나 고리도 결코 만만한 정치인은 아니다. 요즘 며칠동안의 일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세련되고 비범한 인물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위」에서부터 내리미는 식이 아니고,「밑」으로부터 끌어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5일 공산당 중앙위전체회의를 하루 앞두고 붉은 광장엔 볼셰비키혁명이후 최대 규모라는 20여만명의 군중이 모여 데모를 했다. 이들은 「공산독재 끝장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전 같으면 비밀경찰이 단숨에 달려들어 잡아갔을텐데,물론 그런 일이 없었다. 고리는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밑에서 넓고 든든하게 만들어 놓고 중앙위에 임했다.
또하나 그의 절묘한 정치술은 쿠션 장치에서도 볼 수 있었다. 중앙위전체회의에 중앙위원보다 더 많은 3백명의 참관인들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회의가 끝날 때 마다 세계의 매스컴 앞에서 그 분위기를 설명해 주었다. 지령과 박수만 있던 회의장에 지금은 격렬한 비판과 성토도 있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준 것이다.
회의장에서 자유토론을 허용한 것은 고리의 반대파들에겐 분풀이의 호기였다. 고리는 그것을 계산안했을 리 없다. 반대를 짓누르기 보다는 그것에 쿠션을 주어 흡수하는 정치기교를 부린 것이다. 「피의 숙청」 아닌 미소의 혁명이 그의 정치신념을 펴는 데는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능구렁이 같은 정치술은 외교에서도 나타났다. 서방세계 지도자들로부터 두루 환심을 사서 그의 후원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바티칸으로 로마교황까지도 찾아가 『산티타』(성하)를 연발하지 않았는가.
과연 고리는 그의 뜻대로 이번 회의를 탈없이 끝냈다.
어떤 외국잡지는 오늘의 소련사태를 마르크스원작,엥겔스각색,레닌연출,고리 주연의 『20세기 혁명극』이라고 빈정댔지만 고리는 한발 더 나아가 원작을 개작하고 각색하고 연출하고 연기까지 하는 대스타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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