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쓴 편지] 새러 모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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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추리작가 새러다. 살인.음모.반전이 나의 주 언어. 내 소설의 주인공 탐정 도웰은 내 분신이다. 그때 난 병에 걸렸었다. 하얀 모니터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는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출 것을 기다리지만 머릿 속은 까맣게 타들어만 가는 작가의 고질병.

더구나 난 주인공 도웰에 염증을 느꼈다. 내러티브가 전부가 아닌, 인간 관계에 대한 작품을 쓰고 싶은 작가적 욕구가 나를 괴롭힌 것이다. 그때 출판사 사장의 제안대로 별장으로 떠난 건 그래서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남프랑스의 시골에 조용히 자리잡은 이 곳은 완벽한 평온함으로 감싸인 곳이었다. 나는 새로운 도웰 시리즈에 대한 자신감에 설렜다.

그러나 사장의 딸 줄리가 별장에 오면서 틈입을 허용하기 싫었던 평온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앤 바이러스가 우글거릴 것 같은 수영장에서 발가벗고 수영을 했고 남자를 데리고와 육체의 향연을 즐겼다. 함부로 지껄여대는 싸구려 말투와 냉장고에 그득 쌓아놓은 음식. 우린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이 있었고 나는 그걸 걷어낼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건 수영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영장. 모두가 벌거벗고 자기를 드러내는 곳. 일렁이는 물결에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자유롭고 유연한 몸짓을 하는 곳. 이곳에 단 둘이다…가까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의 빗장은 풀려갔다. 난 그의 벗은 몸에 익숙해졌고 무심한 아버지와 죽은 엄마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아이의 일기를 훔친 건 대성공이었다! 난 컴퓨터에 '줄리'라는 새 폴더를 만들었다. 줄리는 새 주인공이었고 막혀있던 창작의 물꼬를 틔운 뮤즈였다. 내 손은 바쁘게 키보드 위를 달리기 시작했고 난 주인공 줄리를 사랑했다.

이럴 때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린다면…하는 내 생각을 알아챈 것일까. 줄리는 사건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읍내 식당 웨이터가 그날 밤 줄리의 밤놀이 상대로 별장을 찾아온 것이다. 둘의 향연이 무르익어갈 때쯤 그는 놀이를 거부했고, 화가 난 줄리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나는 스스로 진화해나가는 주인공과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줄리는 다음날 떠나며 엄마의 습작을 나에게 주었다. 이젠 완벽한 스토리다. 살인을 저지르는 불행한 가정의 주인공, 그가 남긴 죽은 엄마의 유작 스토리는….

가만 가만, 그 스토리가 정말 중요한 걸까. 그보다는 내가 겪은 이야기가 재미있는 한편의 소설 아닌가. 내가 줄리와 함께 주인공이라면. 동떨어진 주인공이 별장에서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다 살인 사건을 계기로 일체감을 느끼고. 그래, 이것이 내가 바라던 새로운 소설이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있고 사건이 있고….

여러분, 지금까지의 이야기 흥미로우셨나요? 이건 제 신작 소설 '스위밍 풀'이었습니다. 제 경험이냐고요? 글쎄요 . 그럼 지어낸 거냐고요? 글쎄요 . 전 수영장의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소설을 쓰고 싶었을 뿐입니다.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만, 사실 어떤 게 진짜고 허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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