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러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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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7년 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모스크바가 떠오르고 있다'는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러시아가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시장경제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투자자들이 앞다퉈 몰려들었다. 무디스 등 국제 신용평가회사들도 러시아의 신용상태가 좋다고 보증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러시아 증시는 10분의 1로 폭락했다. 러시아는 국가 부도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러시아인의 1인당 국민소득도 절반으로 줄었다. 두 명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이끈 미국의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러시아 주식 때문에 단 하루 만에 5억3천만달러를 날렸다.

롱텀캐피털 매니지먼트의 파산이 뉴욕 금융가를 뒤흔드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주요 은행장들을 불러모아 수십억달러의 구제금융을 해주도록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6년이 지난 최근 뉴스위크는 다시 '러시아 시장이 뜨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요즘 러시아의 경제성적표는 화려하다. 99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6.2%에 이른다. 중국 다음으로 높다. 주가도 98년 당시의 최고점을 넘어섰다.

불과 5년 전에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갔던 나라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다. 98년 이후 처음으로 국가 신용등급도 투자적격으로 올라갔다. 벤츠 600 시리즈의 모스크바 판매량이 유럽 전체보다 많을 정도로 흥청댄다.

그러나 뉴스위크는 6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듯 이번엔 러시아 경제의 약점도 함께 지적했다. 세계은행 등은 러시아 경제가 석유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을 문제로 꼽고 있지만, 뉴스위크는 이보다 러시아의 정치불안을 더 큰 걱정거리로 지목했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법치(法治)나 시스템보다는 인치(人治)에 의존하고 있어 외국 투자자금이 본격적인 러시아행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실력자들이 이권을 따내기 위해 설치고, 푸틴 대통령이 이들의 중재자로 군림하는 상황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뉴스위크는 경제 붐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정치상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 경제의 장래를 낙관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경제의 가장 큰 적은 불확실성, 특히 정치적 불확실성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