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뒤안길 밝게 비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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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스스로 몸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사건현장을 뛰는 취재기자들은 사건을 접하면서 느낀 감동과 뒷 얘기, 있는 그대로의 현장 상황을 원고지 5장의 한계 속에서보다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올해도 숱한 밤을 지새우며 촛불을 밝혔다.
올해 지면에 등장한 촛불은 1백회로 일요일을 제외하면 사흘에 한번 꼴로 타오른 셈이다.
노사분규, 잇단 밀입북, 대학가의 진통, 전교조 등 사건이 꼬리를 물고 격동 칠 때마다 촛불은 어김없이 현장의 한복판에서 활활 타올랐고 때로는 사회의 가장 깊은 어둠 속을 조용히 비추기도 했다.
올해 첫 촛불은 때마침 일기 시작한 반미분위기를 반영해 초년병 기자가 부당노동 행위를 일삼는 외국기업주의 횡포를 비판하는「한국에 오면 한국법을 따르라」로 힘찬 출발을 했다.
2월14일자「농민들의 살벌한 한풀이」는 여의도광장을 휩쓴 농민대회 현장을 담았고 3월1일자「동심 짓누른 가난의 집」은『우리가 죽으면 어려운 살림이 펴지겠다』는 서울 공항동 네자매 음독자살사건의 뒷 얘기를 밝혀내 사회에 온정의 밀물을 불러일으켰다.
3월말에는 서울 지하철 파업과 울산 현대 중공업파업 등 격동하는 노사분규 현장으로 촛불은 달려갔고 연이어 터진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 때는 편집국에 빗발친 독자들의 전화 내용을 모아 다시 독자들에게 숨김없는 목소리로 들려주기도 했다.
5월 부산 동의대 사태 때는 6명의 젊은 전경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끝간데 없이 치닫던 학원폭력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냈고 이어 6일자 촛불은 이 사건으로 숨진 경찰관의 외아들이 맞은 슬픈 어린이날을 통해 주위를 숙연하도록 만들었다.
교육계는 물론 사회전체가 전교조 파문에 휩쓸린 6월, 촛불은「연행교사의 마지막 수업」 「잡아가고 잡혀가는 교사」등 일곱 차례에 걸쳐 현장에서 바라본 전교조 파문을 담았다.
7월 노점상 일제 단속 때에는「질서유지」라는 공권력의 논리와「생존권 확보」라는 노점상의 하소연 가운데서 촛불은 스스로 떨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9월 사할린 동포의 고국방문 현장에서는「50년만의 혈육상봉」을 통해 주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설인종군 폭행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촛불은「중학생회의 사죄조문」을 통해 자숙하는 대학가를 그렸고 대학가가 총학생회 선거 열풍에 쌓였던 11월에는 주사-비주사파의 치열한 접전을 현장 중계하기도 했다.
이밖에 촛불은 비뚤어진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넓고 깊게 퍼지는 마약」「환각제에 찌든 무서운 10대」「제비족의 가정파괴」등 은밀히 번지는 우리 나라의 탈선현장을 숨김없이 비추었고 라면파동 때는 독자들의 생생한 분노를 그대로 담았다.
「철거민의 겨울걱정」「교통사고 앞에 방치된 청소원」「원폭피해의 대물림」등의 촛불은 이 땅의 소외된 계층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고「가난이 부른 여고생의 죽음」「길고도 초조했던 하루」는 입시과열이 낳은 구체적인 피해사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곳에서 열심히 촛불을 피워 올렸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 촛불이 비추어야할 부분이 더 많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올해를 마감하면서 어쩌면 더 이상 촛불이 타오를 필요가 없는 90년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현장을 뛰는 모든 취재기자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이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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