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연산을 웃긴 광대 이야기 爾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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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에서 최고의 사랑을 받는 드라마는 단연 MBC의 '대장금'이다. 성공 요인이야 여러가지겠지만, 궁중 애정사나 권력다툼 대신 수라간 궁녀를 위시한 궁궐의 뒷얘기라는 소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정동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이(爾.김태웅 작, 연출)' 또한 단골 레퍼토리인 연산군을 소재로 했지만 '아하, 궁중에서 저런 일도 벌어졌구나!'라고 이마를 칠 만큼 특이한 소재로 차별화한다.

이 연극은 조선시대 왕을 웃기는 광대들의 이야기다. 이들 우인(優人)은 왕을 위해 내전에서 즉석 놀이를 선보였다. 이들은 몸짓보다 말로 웃겼는데 쉽게 말하면 오늘날의 개그 콘서트와 같다. 그러나 웃음이라는 코드를 전제로 한다고 이 연극이 경박하거나 가벼운 것은 아니다.

때는 연산군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정국에 피를 뿌리던 시절.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즉결 처단하는 연산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어미처럼 다정한 녹수와 연신 즐거움을 주는 광대 공길이었다.

연산은 우인을 관리하는 희락원을 만들어 공길을 관리자에 임명한다. (이 연극의 제목 이(爾)는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칭호로, 연산은 공길에게 '이'라고 칭했다) 왕의 총애를 받는 공길은 질투에 눈먼 녹수의 음모로 죽음과 맞닥뜨린다.

이 연극의 무대는 단정하면서도 음산하다. 피비린내 나는 당시를 암시하듯 연산이 앉은 의자와 궁궐의 바닥은 모두 관뚜껑이다. 조명 역시 상가의 등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무거움을 깨는 것은 다름 아닌 우인들의 놀음, '소학지희'다. '이'에는 세번의 소학지희가 등장한다. 뇌물을 주고 받는 양반가에 대한 풍자, 농민을 착취하는 지방 관리에 대한 고발 등을 소재로 삼는다. 우인들의 익살맞은 표정과 대사는 보는 이들을 연신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세번째 소학지희는 장님 놀이다. "(강물이) 어찌 깊던지 거꾸로 서면 눈썹이고 바로 서면 발목에 차네" "용포 입은 개(왕) 하나가 내 똥구에 코를 쳐박고…그래 내가 십년 묵은 무시(무의 사투리) 방구 고구마 방구를 뿌웅뿡 날리네" 등에선 언어 유희와 풍자가 극에 달한다. 하지만 웃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찡해질 만큼 극은 웃음과 긴장의 완급조절에 탁월하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고문형사로 나왔던 배우 김내하의 폭군 연산 연기와, 동성애적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공길 역의 오만석의 앙상블이 뛰어나다. 11월 2일까지. 02-751-1500.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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