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함과 맑은 정신에 대하여

중앙일보

입력


어제는 서울에서 진료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A.A(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 공개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송년 행사를 겸한 것으로 많은 가족들도 함께 참석하여 훈훈한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중독자들은 한결같이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70대 나이 드신 할아버지부터 30대 젊은 분까지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부터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 건강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 좋은 남편, 아빠로서 소임을 다하고 정겨운 가정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음을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A.A 공개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참으로 좋은 재충전 시간임을 새삼 느낍니다. 힘든 환자를 만나면서 심신이 지치고 힘들 때 맑은 정신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중독환자를 만나는 것은 나에게 힘을 주고,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내가 중독자를 떠나지 않게 하는 커다란 원동력이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지요.

▣ 정신질환은 비현실 세계에서 사는 것

정신질환이 무엇이냐 ? 한마디로 답을 한다면 이는 "비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세계가 너무 고통스럽고 더 이상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비현실 세계인 망상의 세계, 정신병적인 세계에만 집착하려는 것입니다.

술 취한 정신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는 것은 분명 비현실적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중독자들에게는 거의 그렇습니다. 취했을 때는 뇌신경에 변화를 주어 일시적이고 부적절한 안락함, 즐거움, 쾌감을 주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많은 문제 행동과 고통을 일으킵니다.

술이 깨는 현실세계에서는 자기 연민에 쌓이고 화, 분노가 치솟아 오르고, 괜히 세상이 싫고, 자책감, 우울감, 수치심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건강은 물론이고 가족의 건강에도 심각한 위협을 줍니다. 부부갈등, 폭력, 이혼, 별거의 원인제공이 되고 자녀들의 정신건강을 병들게 합니다. 우리 사회가 갖는 경제적 손실 또한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큽니다.

맑은 정신으로 살아감은 술이 주는 순간적인 쾌감이나 안락감은 없지만 현실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고 궁극적인 평온함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생각하게 되고 이성으로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또한 술 취하고, 술에서 깨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건전한 시간으로 활용하여 삶의 새로운 기쁨과 경험을 맛볼 수 있게 만듭니다.

한국이 OECD 국가중 술 소비량이 최고라는 신문 방송의 보도가 연말을 더욱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나와 가정과 사회를 걱정하면서 우리 사회가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기 켐페인을 벌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술 없는 맑은 정신이 주는 평온함과 자존감, 나와 가족이 느끼는 사랑과 행복감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들은 이 기쁨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 100일 금주작전, 100일 맑은 정신 유지하기 운동

이러한 기쁨을 맛본 많은 회복되어가고 있는 중독자들이 바로 증인들입니다. 이제부터술을 즐겨 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은 아니더라도 100일 금주작전, 100일 맑은 정신 유지하기 운동을 이 사회에서 시작하자고 저는 제안합니다.

장시간의 맑은 정신이 가져다 주는 충만된 기쁨과 만족감은 취함으로써 얻는 비현실적인 쾌감과 안락함과 바꿀 수 없는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100일 금주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주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