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국 덴마크의 이면···“무동의땐 강간” 이제야 법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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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정부가 성폭력을 판단하는 법적 근거에 '강압과 폭력'이 아닌 '당사자 동의'를 넣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성폭력 판단 근거에 당사자 동의 넣어 #국제앰네스티 "성폭행 피해자 실제론 더 많을 것" #2년전 스웨덴도 법 바꿔 강간죄 유죄판결 75% 늘어

2일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닉 헤케루프 덴마크 법무부 장관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강압과 폭력이 있어야만 강간이라고 판단했던 제도에서 상대방 동의가 있어야 하는 제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에서 명백한 동의가 없는 성행위는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법안이 제안돼 연내 통과를 앞두고 있다. 강압과 폭력이 있어야만 성폭행이라고 규정했던 것에서 상대방 동의 여부가 성폭행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사진은 집단 강간 피해 사건에 분노한 여성들이 "No는 No다", "목소리를 높여라"라고 쓰인 팻말을 든 모습. [AFP=연합뉴스]

덴마크에서 명백한 동의가 없는 성행위는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법안이 제안돼 연내 통과를 앞두고 있다. 강압과 폭력이 있어야만 성폭행이라고 규정했던 것에서 상대방 동의 여부가 성폭행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사진은 집단 강간 피해 사건에 분노한 여성들이 "No는 No다", "목소리를 높여라"라고 쓰인 팻말을 든 모습. [AFP=연합뉴스]

덴마크 여성 단체들은 이 변화를 환영했다. 덴마크 여성 연맹은 2일 "성적 결정권에 대한 역사적 승리를 환영한다"는 논평을 내놨다.

가디언은 "이 제안은 덴마크 의회 내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어 올 연말까지는 채택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닉 헤케루프 덴마크 법무부 장관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강압과 폭력이 있어야만 강간이라고 판단했던 제도에서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제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EPA=연합뉴스]

닉 헤케루프 덴마크 법무부 장관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강압과 폭력이 있어야만 강간이라고 판단했던 제도에서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제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EPA=연합뉴스]

그동안 덴마크 법에서는 성폭행의 정의를 물리적 폭력과 강압, 혹은 피해자의 불능상태에서 이뤄진 관계라고 규정해왔다. 위협과 폭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어야만 강간죄로 처벌 가능했다.

이렇다 보니 덴마크에서는 성폭력 피해 신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이 많았다. 국제 앰네스티는 "동의 없는 성관계를 성폭행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신체적 폭력이 개입됐는지,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었는지를 중심으로 성폭행을 정의한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양성평등이 달성된 곳으로 인식되는 덴마크의 이면에는 뜻밖에 성폭력 피해자가 고통받는 현실도 있었다. 지난해 국제 앰네스티는 유럽 내에서도 성범죄가 심각한 덴마크의 사례를 지적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피해자들이 성폭행을 신고하는 과정에서 종종 무시당하거나 피해자 탓이라는 지적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분석했다. 덴마크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신고 의도를 묻거나 옷차림을 지적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덴마크에서는 성폭행이 제대로 신고조차 되지 않고 묻히는 사례가 많을 것이라고 국제앰네스티 보고서가 밝혔다.

한 덴마크 남성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문장을 보여주고 있다. [트위터]

한 덴마크 남성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문장을 보여주고 있다. [트위터]

덴마크와 비슷하게 강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스웨덴은 지난 2018년부터 폭력이나 위협을 행사하지 않았어도 명백한 동의가 없으면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꿨다. 성폭행의 범위를 넓게 본 것이다. 그 결과 스웨덴의 강간죄 유죄판결 건수는 지난해 333건으로, 2018년보다 75% 증가했다고 가디언은 덧붙였다.

현재 유럽국가 중 영국·아일랜드·벨기에·키프로스·룩셈부르크·아이슬란드·독일·스웨덴 등 8개국이 성폭행에서 상대방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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