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씻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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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고, 남이 나에게 해주는 정성이나 섬김일 것입니다. 만일 이런 섬김을 값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병실 복도에서 커다란 남자와 아담한 여자의 실루엣이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환의를 입고 있는 남자 환자는 유난히 큰 키에 오랜 투병생활로 말라서 몹시 꺼부정해 보입니다. 그 옆의 부인은 아담하고 작아서 몹시 대조적입니다. 오랜 병원 생활로 지쳐있는 환자 곁에 그 부인은 늘 웃음을 잃지 않고 간병을 해 주고 있습니다. 나이든 얼굴도 곱게 화장을 해서 아름답게 치장하고, 정갈한 옷차림으로 곱게 늙었다는 인상을 보여줍니다.

늑막에 고름이 잡히는 농흉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대개는 만성질환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병을 키우게 되고, 이 환자도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은 한 쪽 가슴이 모두 석회화로 변화되었습니다. 배농을 해야 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입원기간은 계속 길어졌습니다. 일차 수술 후에도 석회화가 된 농흉주머니를 완전히 제거하기가 불가능하여 흉벽함몰술을 시행하였습니다. 늑골을 여러개 부러뜨려야 하는 수술이기 때문에 수술 후에 통증이 심하여 견디기 어려운 수술입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결정한 수술 후에 고름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고 농흉내부의 공간이 좁아지면서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늘 있던 고열도 떨어지고, 환자의 전신상태가 좋아지면서 어느 정도 활동이 가능해져서 입원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늘 사식을 만들어 배달하던 부인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씩 입원해 있는 환자를 보면서, 저는 한 편으로 그런 환자의 처지가 부러웠습니다. 일에 지쳐서 회진을 돌다가 그 환자를 보면 ‘저렇게 일을 안하고도 몇 달을 지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환자가 퇴원을 하고 몇 개월 후에 수술 부위의 이상으로 재입원을 하였습니다. 재 수술을 권유하였을 때, 환자는 무척이나 실망을 하였습니다. 이전과 같이 큰 수술은 아니지만 재수술을 한 후 환자는 경과가 좋아 다시금 건강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회진을 돌면서 살짝 열려 있는 방문 틈으로 환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환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고, 부인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고 있는 환자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있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친 부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눈인사를 합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제 마음에는 무언가 찌르르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르는 그 한 순간이 왜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늘 샤워를 하는 버릇 때문에, 늘 혼자 씻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져서 사람이 사람을 씻어주는 모습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과거 어린 시절에 어머님을 따라 한강가로 빨래를 하러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강물을 가지고 제 머리도, 몸도 씻겨 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장면이 오버랩되고,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에서 주인공의 머리를 씻겨주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침대에서 꼼짝못하는 중환자를 씻겨주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늘 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일상 활동이 가능하고 남이 씻겨주어야 할 정도의 환자가 아닙니다. 이런 환자의 발아래 앉아서 씻겨주고 있는 부인의 모습이 왜 그리 감동적이었는지요. 그러면서 웃음을 띄고 말을 하고 있는 부인의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급 음식점이나 호텔에서의 서빙을 좋아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고, 남이 나에게 해주는 정성이나 섬김일 것입니다. 만일 이런 섬김을 값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저는 그 순간 환의를 입고 발을 내밀고 있는 그 환자의 처지가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내가 정말 마음을 다해서 남을 섬기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발을 씻겨주어 본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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