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원순 수사 상황 누설한 게 누군지 규명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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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자신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을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박 전 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날인 8일 오후 4시30분 피해자의 고소장 제출-9일 새벽 2시30분까지 고소인 조사-9일 오전 10시44분 박 전 시장 일정 취소한 채 잠적 등의 상황을 고려하면 거의 실시간으로 수사 정보가 빠져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피해자를 상대로 권력이 2차 가해를 저질렀다”는 고소인 측과 야당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형사사법시스템 훼손은 또 다른 국정농단 #공소권 핑계대지 말고 철저한 조사 필요

피소(被訴) 사실을 박 전 시장에게 알려줄 수 있는 곳은 경찰과 청와대 등 두 곳 정도다. 경찰이 “박 전 시장이 고소당한 것을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과 청와대 모두 “박 전 시장에게 고소장 접수 및 수사 상황을 알려준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공무상 비밀에 해당하는 수사기관의 조사 내용이 어처구니없이 흘러나간 것에 대해 철저한 수사가 필요한 이유다. 경찰도 “가해자의 사망으로 공소권이 없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 아니라 비밀이 유지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조사를 벌여야 한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20대 여성의 도움 요청을 외면한 채 국가기관이 앞장서 또 다른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는 심각한 국정 농단 행위다. 형사 사법과 관련된 국가 시스템을 사적으로 이용하고도 공정과 정의, 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 수사 상황의 누설은 특히 상대방에 대한 회유나 협박은 물론 박 전 시장과 같은 권력자들이 증거인멸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불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정 농단 죄로 탄핵을 받게 된 것도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에서 비롯됐다. 국무회의에서 말할 내용 등이 최순실씨에게 사전에 흘러들어간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당장 야당에선 특임검사 임명이나 국정조사 등을 추진키로 했다. 당국의 수사 의지가 없다고 판단되면 독립적인 수사기구를 만들라는 여론은 더욱 커질 것이다. 여성단체 등에서는 “이번 사건은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수사와 3차, 4차 조사를 거듭 요구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짓밟은 권력자의 불법행위는 반드시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4년 가까이 참아 오던 피해자의 시정 요구에 대해선 “그럴 분이 아니다”며 못 본 척하거나 애써 외면해 왔던 서울시 관계자들도 수사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서울시 부시장을 거쳐 국회의원이 된 사람까지 가짜 미투 의혹을 제기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일부 관계자는 직권을 남용했거나 직무를 유기했다는 의혹까지 사고 있다. “힘들다 울부짖고 싶었습니다”라는 피해자의 절규가 헛된 외침이 돼선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