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 '좋은 남편' 되기 위해 노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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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좋은 남편입니까, 아니면 좋은 아버지입니까. 남성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은 좋은 아버지쪽을 택하고 싶어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은 자신이 '좋은 아버지' 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해도 '좋은 남편' 으로 불리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기 때문. 설령 자신이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도 그 사실을 직장 관계자들이 알게될까 두려워한다.

가정에 충실한 것이 직장 생활에 플러스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그만큼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는 얘기다.

가정의 소중함은 어려운 때일수록 빛을 발하는 법.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안팎으로 쪼들리는 상황이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 고 선언한 이들이 있다.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 바로 그것이다.

"아내가 몹시 피곤해 보이던 날, 설거지를 할까 말까 망설인 적이 있었어요. 아내에게 잘해주고 싶지만 마음만큼 표현하는 게 늘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올해로 결혼 9년째인 김영석(35.태권도장 운영) 씨. 그는 바로 몇달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이란 전통적 역할 구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았다.

하지만 몇달 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힘들어 보일 때는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한다. 토요일엔 두 아이를 보살피면서 아내에게 자유시간을 주는가 하면 아들과 함께 바둑을 두거나 숙제와 준비물을 챙긴다.

"작은 일이지만 아내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저도 좋아요. 가정에 소홀하다고 느끼면서도 가족의 이해를 바라는 쪽이었는데, 그건 예전에나 통하던 남편.아버지상인 것 같아요. "

김씨는 가정경영연구소(http://home21.co.kr)에서 실시하는 '남성들을 위한 가족생활 향상 프로그램' (주 1회.6주 강좌) 에 참여하고 아예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 에 참여한 경우.

김씨의 부인 하현주(30) 씨는 "자존심 강하고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남편때문에 속상해하다가 프로그램을 신청하고도 남편에게 말을 꺼내기까지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면서 "이제는 작은 일이라도 나의 의견에 귀기울이려 하는가하면 아이들에게 애정 표현이 늘어난 남편의 변화가 놀라울 정도" 라고 덧붙였다.

인터넷 바둑게임 사이트 ㈜수담컴 대표이사인 전종한(43) 씨도 이 모임의 열성 회원중 한 사람이다.

"결혼생활 십여년 만에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이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아내에 대한 배려가 줄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는 그는 "연말 모임도 아내와 함께 갈 수 있는 자리를 택하는 등 앞으로 아내와 둘이서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가급적 늘릴 계획" 이라고 말했다.

'좋은 남편' 이 되기에는 젊은 사람들이 더 적극적이다.

올해 30세의 회사원 이정복씨는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개방적인 남편이 되고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정작 결혼하고 나서는 생각과는 달리 다소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내 성향에 스스로도 놀랐다" 면서 "가정이 소중한 만큼 노력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이 모임에 참여한 남편들이 새삼 깨달은 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아내와의 대화가 그렇게 중요한줄 몰랐다' 는 것.

정명기씨(38.회사원) 씨는 "전에는 아내와 집안 얘기를 안하는 편이었고 아내를 배려하기보다 나를 인정받으려는 욕심만 부렸다" 면서 "하지만 가정에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말했다.

정씨는 요즘 아내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등 아내의 입장과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일찍 퇴근한 날이면 초등학교 1학년인 딸과 손잡고 산책을 하곤 한다고 했다.

지난 7월 이 모임을 만든 사람은 '남편이 변하면 가정의 혁명이 일어난다' 고 주장하는 가정경영연구소의 강학중 소장. ㈜대교의 부사장으로 재임하다가 97년 회사를 그만두고 올해 초부터 가정상담교육연구소가 개발한 프로그램에 남성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강소장은 "아내를 제대로 아는 남편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아내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이라면서 "먹고 살기 어려운 때 가정을 뒷전으로 밀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경영 이론에서 보면 가족만큼 안정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투자 대상도 없다" 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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