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람사전

독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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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람사전용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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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고 책은 나를 읽고. 책과 내가 마주 보고 서로를 읽는 것이 독서. 나도 그렇지만 책도 맨날 똑같은 나를 읽으면 재미없겠지. 싫증나겠지. 책에게 늘 새로운 나를 보여주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독서다.

〈사람사전〉은 ‘독서’를 이렇게 풀었다. 책을 읽는 동안 책과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안경 하나. 아니면 책과 나 사이를 가볍게 통과하는 바람 한 줌. 책과 나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내가 일방적으로 책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책도 나를 응시한다. 책에게 어제의 나를 다시 보여준다면 하품하겠지. 또 그 녀석이군.

책 속엔 지식과 지혜와 통찰이 가득하다. 그래서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다면 책을 펴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책이 건네는 지식과 지혜와 통찰을 꿀꺽 받아먹기만 하고 책을 덮는다면 새로운 나는 없다.

독서란 책에 누워 있던 작가 생각이 새처럼 날아올라 내 머리 표면에 똑똑 노크를 하는 것이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쿨쿨 잠자던 내 생각이 깨어난다. 형체를 알 수 없었던 내 생각이 비로소 모습을 갖춘다. 이제 보인다. 내 생각이 보인다. 나도 몰랐던 내 생각, 그것을 작가 도움으로 찾아내는 것이 독서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책 속에 있는 건 길이 아니라 글이다. 글이 그럴싸한 표지와 그럴싸한 두께로 내 앞에 놓여 있으니 그럴싸한 길로 보이는 것이다. 작가가 찾은 작가의 길을 엉금엉금 뒤따라갈 이유는 없다. 내 두 다리의 주인은 나니까. 주인이 손님에게 길을 묻는 건 웃기는 일이니까. 아니 슬픈 일이니까. 책만 그럴까. 신문도 그렇겠지. 이 칼럼도.

정철 카피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