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은 「무정제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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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의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확신과 낙관의 이미지만을 전달함으로써 평범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쾌활한 모습으로 순진하게 호소하는 아이젠하워의 모습을 당시에는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사실 그것은 후에 역사가들에 의해 직무유기의 한 형태임이 판명됐다.
자신의 지도력 보존을 꾀한 대통령들은 정책결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수법을 써왔다.
아이젠하워와는 달리 레이건대통령의 진정한 모습이 밝혀지는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점에서 이란-콘트라사건과 올리버 노스중령사건이 알려진 것은 우리시대의 행운이라고 할만하다.
레이건의 보좌관들이 써낸 회고록은 레이건이 하딩대통령(29대·1921∼1923년재임) 이래 어느누구보다도 행정부의 정책에 무지하고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히고있다.
예산국장이었던 데이비드스토크먼은 레이건이 세금인하에 대한 믿음만 있었지 세금인하가 군비증강과 합쳐져 거대한 연방예산적자를 발생시키리라는 것은 무시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재무장관이었던 도널드 리건은 재임 4년동안 대통령과의 단독대좌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쓰고있다.
리건재무장관과 비서실장 제임스 베이커가 서로 직책을 바꾸겠다고 하자 레이건은 한마디 토론도 없이 이 제안을 수락했다고 그는 밝혔다.
국내문제보좌관 마틴 앤더슨의 책에는 레이건을 「참모들의 저당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레이건이 경제정책등 주요사안을 변경할때 전혀 후회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레이건은 협상하기를 좋아했는데 항상 보다 더 많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시키곤 했다.
레이건은 결정을 별다른 고려도 없이 빨리 내렸으며 대부분의 권한은 참모들에게 위임했다.
바로 이점이 레이건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앤더슨은 표현했다.
레이건은 참모들이 제시한 여러 대안중에서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러한 대안들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는 일도 없었고 더구나 내용을 수정하는 일이란 없었다.
따라서 능력있는 보좌관들이 진을 치던 집권 1기에는 일이 갈돼나갔지만 보좌관들의 수준이 떨어질때에는 노스중령사건 같은 재앙이 발생했다.
앞으로도 이러한 무정책대통령 레이건에 대한 문서들이 속속 밝혀져 그의정체를 확인시켜줄 것이다.<그린스타인·프린스턴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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