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50주년 에세이 공모] 학생부 장려상 최혜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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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Orerdorfer’라는 미국인이 쓴 Two Korea의 서문은 1950년대 미국을 회고 하면서 시작한다. 군용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모습은 비참하고 애처로왔다. 당시의 한국은 기차에 매달리며 먹을 것을 요구하던 더러운 아이들, 불구가 되어 버린 아이들이 가득한 곳이 였다. 미국인이 갖는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한국의 모습은 50년이 지난 지금 월드컵을 개최하여 광화문과 시청을 붉게 물들이고, 반전-반미 시위에 촛불을 들고 나서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과 한국의 발전 그리고 미국의 채권자적 의식으로 바라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 이 벌어 진 것이다.

세계 2차 대전과 한국 전쟁, 두 차례의 큰 전쟁 후 한국은 미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패배로 마무리 짓고, 우리에게는 날벼락 같은 해방이 왔다. 그리고 그 해방은 곧바로 냉전이라는 양극 체제에 휩쓸리고, 3.8선이 한국의 허리에 그어지게 된다. 그 당시 한국은 미국의 주된 관심에서 벗어난 주변 지역이었고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부차적이거나 전무하였다.

이는 한국 문제의 UN으로 이관, 주한 미국 철수 등의 미국 정책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경제 원조는 계속 되었는데, 미국 안보에 필수적이지 않은 부차적 지역에서의 봉쇄 정책은 군사적 수단 보다는 경제적 수단에 의해 수행하려는 미국의 필요에 의한 정책이었다.

한국 전쟁은 미국의 대외 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남북한은 분단 체제가 고착화 되었고, 미국은 한국을 더 이상 미국 안보의 부차적 지역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은 북한이 단순히 내부적 통일 이라는 제한된 목적으로 일으킨 내전이 아니었다. ‘국제공산주의’ 에 입각하여 세계정복을 이루려는 소련의 명백한 도전이었고, 이 결과 무제한적인 공산주의 팽창은 결국 미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한 위협과 소련에 대한 위협이 맞물려 한국과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주한 미군이 지속적으로 주둔 하게 된다.이후 닉슨 독트린으로 전면적 개입을 축소 하는 방향으로 조정 되었다가 레이건 정부 때 양국 관계를 동반자적 관계로 격상 시키고, 카터 정부 당시 감축 되었던 주한 미군 병력을 오히려 증가 시키게 된다.

탈냉전 후 미국은 상대하여야 할 거대한 적수를 잃어버리고 과거와 같이 명분이나 이념에 의해 세계 정책을 펴나갈 동기를 상실하게 된다. 이 때부터 미국의 정책은 철저히 실리 위주의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위치 역시 이때에는 이미 과거보다 훨씬 격상되어 있었다.

미국은 동북아 지역이 어느 한 나라의 패권아래 놓이는 것을 막아야 했고, 높은 수준의 기술과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무장한 동북아 지역의 경제권에서의 이익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이 지역의 안보가 필수적이었고, 이를 위한 대북견제는 미국으로서는 떠안기는 싫지만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숙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미공조는 과거와는 다른 양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과거 냉전 시대에 북한은 소련의 대리자로서 미국에 위협이 되었고 미국은 한국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북한이 핵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의 안보를 담보 삼아 게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9.11테러 이후 세계화에 낙후된 나라들과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의 한 일환으로 북핵을 보고 있다. 한국 역시 북핵은 중차대한 위기이며 미국과의 공조가 매우 절실한 시기이다.

하지만 한미동맹에서 한국의 위치와 상황이 변화되었고 이에 따라 한미동맹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먼저 동맹의 목적이 변화되었고, 과거 미국의 동맹에 소요되는 부담을 거의 지불한 것과는 달리 한국이 방위부담을 증강하여 지금은 많은 부분 한국이 부담하고 있다. 또 한국 내의 여론 역시 이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한 지금, 과거와 같은 불평등한 구조는 주권국가로서의 위신을 손상하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미 관계는 시작부터 일방적인 원조로 시작되었다.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반도를 휩쓸던 그 때에는 반공과 친미는 우리 앞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한국에게 미국은 정서적으로 하나의 ‘이상’이였고, 실질적으로는 ‘밥줄’이였다.

미국것은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하지만 미군정 시기의 향보단, 제주 4.3사건등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부 군사 정권 그리고 1980년 ‘광주’에서의 사건 이후 미국은 민족 분단의 주범으로, 민주화 세력의 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에서 우리는 미국과 유럽만을 외국으로 인식했고, 그들에게 인정 받고 싶은 자존 의식과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강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결국 한국의 ‘반미’는 과거의 맹목적 ‘친미’에 대한 반성이라는 성격과 민족적 자존의식의 분출이었다.

2002년에는 세계 4강이라는 신화와 함께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루어 내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의식이 크게 향상되었던 시기였고, 이는 미선이-효순이 사건으로 불리는 장갑차 사건과 맞물려 대규모의 ‘촛불시위’라는 반미 시위를 불러내게 되었다.

이 때의 반미 시위는 아랍계의 반미시위와는 뿌리와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지만 과거 한국에 대한 채권자적 의식을 아직 가지고 있는 미국에게는 불쾌하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한국 내의 반미 정서는 일은 한미관계가 양국의 partnership을 바탕으로 한 동반자적 위치로 상승, 조정되지 않는 한 계속 될 것이다.

탈냉전 시대의 한국은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한미 관계를 다시 정립함으로써 보다 자주적인 방향의 대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중국 베이징에서의 ‘6자 회담’에서 보여지듯이 북한과의 관계 역시 단순히 북미관계에서 해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동북아 다자간의 관계를 통해 해결 되어야 할 것이다.

주한 미군에 대해서도 북한이라는 현실적 위협이 존재하는 한 주한미군의 조기 철수는 배격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에 주한 미군이 영구히 혹은 필요이상 오랫동안 배치되는 것 역시 우리의 자주성 측면에서 심각한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을 어떻게 보든지에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미국은 세계 유일의 ‘super power’이다. 이런 미국을 상대하는 길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로 회기 할 수 없다면 결국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다. 이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 가는 정치가의 손에만 달려 있지 않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부정적이고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미국에 대한한국의 시각 역시 꾸준히 반성 되고,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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