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커어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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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커어브’-황학주(1954~ )

문방구 근처로 명랑한 선생님의 백묵처럼 눈발이 날린 뒤

도로 비가 오고

블록담을 다 돌아가지 못해

떠오르는 당신의 창

있다가 없어진 튼튼한 구식의 가전제품 모델 같은

안아도 안아도 얼음배긴 염창동의 그리운 사랑이여,

사랑은 크게 흘러내리는 눈물 끝을 믿는 것이어서

이담에 보면 어둡게 오래 선 우리 사랑도 보이게 될까

풀잎들은 경사지를 잡아맨 채 강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가쟁이 근처 사고가 있었던 듯

새집 둘레는 얼어깨진 화분처럼 걸려 있다

이 한강 줄기에 저렇게 작은 집이 아프고

더 작은 내 마음의 집 안으론 비의 넌출이 쑥쑥 걸어오는데

교량 위 도저히 변하지 않는 바쁜 사람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

헤어진 당신과 나는, 이 시대는

커어브가 가능할까 또 조용한 눈물은 직진해 내린다



삶에 핸들이 있어서, 핸들을 돌리는 대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거기가 천국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천국이 아니어서, 여기는 오탁악세여서, 핸들은커녕 차선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그때 커어브가 가능했다면, 사랑은 추억할 만 했으리라. 매번 과거를 미래로 옮겨다 놓는 조용한 눈물이 있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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