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은행 「검은 돈 은신처」명성 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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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전세계 검은 돈의 은신처로 각광을 받으며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호황을 누려온 스위스 은행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0%를 웃돌던 총자본이익률이 최근 들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스위스 은행의 화려한 명성은 잊혀진 과거로 묻혀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스위스 은행 관계자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다.
스위스 은행들이 퇴조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동안 이들 은행이 유지해온 비밀 결사적인 협조체제가 무너져 가고 있고 일본 등 외국계 은행의 공략이 심화되면서 스위스 금융시장 자체가 점차 살벌한 경쟁 터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위스 의회가 다른 나라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 부정한 돈벌이와 관련된 검은 돈의 유입을 금지하는 입법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4월 스위스 공정거래 위원회는 스위스 은행들의 18가지 불공정사례를 밝혀 내고 최종보고서 작성이 끝나는 대로 시정명령을 내릴 방침이다.
이에 따라 중개수수료·외환매매 수수료·금고사용료 등에 대한 은행간 담합 체제가 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 그 동안 크레디스위스·스위스뱅크 코퍼레이션·스위스 유니언뱅크 등 3대 은행이 독점해 오다시피 한 정부채권 인수업무도 담합금지 차원에서 자유경쟁에 맡겨질 전망이다.
스위스에 들어와 있는 외국은행이 이미 1백28개에 이르고 있고 특히 노무라·후지·동경·스미토모 등 일본계 은행이 급속히 세력을 확장, 스위스 은행들의 입지를 갉아먹고 있다.
마약 등 불법거래에 관련된 돈을「비밀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스위스 은행에 맡긴 뒤 이를 합법적인 돈으로 다시 빼돌리는, 이른바「검은 돈 세탁」문제가 또 다시 논란이 되면서 스위스 의회가 예금을 받을 때 은행의 주의의무를 제도화하는 법안마련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스위스 은행으로서는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스위스 은행들은 유가증권 등 모든 금융거래에 부과되는 인지세 폐지를 정부에 강력히 요청하고 해외 금융시장 진출을 강화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또 오는 92년 말로 예정된 EC(유럽공동체)통합에 대비, 이탈리아·스페인 등 시장 전망이 좋다고 판단되는 EC 회원국 시장에 대한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은행들이 과연 과거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이다.<배명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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