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한 동심 -김행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스승의 날에 즈음해 큰애 학교의 일일교사로 추대됐다. 애들에게 유익한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 궁리하다 며칠 전 동화책에서 읽었던 「큰 나무 작은 나무」를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작은 나무가 욕심을 부려 고마운 큰 나무를 없애더니 결국 자신마저도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교단 앞에 서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하는 순간 선생님의 노고에 대한 감사함에 말문까지 막힐 지경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여 얘기를 풀어나가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이람. 여기저기서 『아는 얘기예요』『시시해요』『다른 재미있는 얘기 해주세요』하고 나서는 게 아닌가. 옛날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이 시키면 그대로 묵묵히 공부했었는데 지금 어린이들은 당당히 자기 의견을 발표하는 것을 보니 새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절감했다.
북새통에 정신이 반쯤 나가 중간부분은 빼먹고 『조용히 해』하고 소리를 질러가며 어찌어찌 간신히 얘기는 끝냈는데, 아직도 수업 시간이 한참 남아있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예정에도 없던 공상과학 이야기를 손이며 발·얼굴표정까지 몽땅 동원해 들려주노라니 어느새 아이들이 잠잠해졌다.
그제서야 비로소 주제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공부에 질린(?) 아이들에게 하루만이라도 가볍고 부담 없이 공상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게 해주는 건데.
짧으나마 그들의 갈증을 조금은 풀어준 듯 느껴져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교실을 나서니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절감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귀밑머리가1mm만 길어도 가차없이 가위질을 해대던 여고시절「시어머니」선생님의 얼굴이 자꾸자꾸 눈앞에 맴돌았다. < 서울 마포구 공덕1동111의278>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