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 학부모 '급식당번'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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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못 푸는 엄마가 나쁜 엄마냐!"

21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 앞에선 '어머니 급식당번 폐지를 위한 모임' 회원 10여 명이 피켓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급식당번제는 여성을 양육의 전담자로 간주하는 성차별적 제도"라고 인권위에 진정을 냈지만 기각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인권위는 "급식당번은 희망자에 한해 이뤄지는 자원봉사제이고, 아버지도 참여하기 때문에 차별적 제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기각 사유였다.

◆ 강제성 띠며 학부모 반발=급식당번제는 애초엔 일부 학부모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됐다. 1998년 초등학교에서 급식이 전면 실시되면서 "내 아이의 급식에 직접 참여해 보겠다"는 게 취지였다. 하지만 점차 학교에서 '당번표'를 만드는 등 강제성을 띠면서 학부모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들의 부담이 컸다. 간호사인 정예숙(32.여)씨는 딸의 급식당번 때문에 한 달에 두 번씩 월차를 내다가 권고사직을 당했다. 정씨는 "맞벌이 엄마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없으면서 급식당번을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어린 아기를 둔 전업주부들도 어려움을 호소했다.

학부모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학부모 당번제를 폐지하라'는 지침을 모든 학교에 내렸다.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는 당번제 대신 순수한 자원봉사제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교육청 관계자는 "지난해 3월 서울시내 초등학교(559곳) 중 76.8%가 강제할당식 당번제를 실시했지만 10월엔 5.4%로 줄었다"며 "자원봉사제를 채택한 학교는 9.4%에서 60.1%로 늘었다"고 밝혔다.

◆ "배식 인력 유급화"=일부 학부모는 '무늬만 자원봉사'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회사원 김모(37.여)씨는 지난달 초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의 배식 당번을 하기 위해 하루 휴가를 냈다. 학기 초 '배식 봉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가정통신문을 받고 고민 끝에 수락했다. 김씨는 "아이를 맡긴 엄마로서 자원봉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급식 자원봉사를 둘러싸고 전업주부와 직장에 다니는 엄마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도 생기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당번표를 짜서 나눠주는 주체가 학교에서 학부모회로 바뀌었을 뿐"이라며 "학부모회에 항의했더니 '아이를 위해 그 정도도 못하면 전학 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당번폐지모임'은 "'급식도 교육'이라는 생각에서 저학년들도 고학년처럼 자율배식을 하도록 하거나, 배식 관련 인원을 유급 인력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배식 인력을 유급화하려면 200억원가량의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한애란 기자

◆ 급식당번제=초등학교 1, 2학년 학생들의 점심 급식을 돕기 위해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 배식과 청소 등을 돌아가며 하는 제도. 학부모들은 보통 한 달에 1~2번씩 배식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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