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병이 앗아간 어린이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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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번 어린이날에는 꼭 함께 놀아주신다고 약속했는데…』 부산 동의대사태 때 화염에 휩싸여 숨진 최동문경장(36)의 외아들 봉규군(8·대연국교2)은 어린이 날인 5일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봉규에게 크레파스등 어린이날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영안실로 찾아온 선생님도, 급우들도 함께 울었다.
지난해 어린이날에도 아빠의 근무 때문에 엄마와 단둘이서만 따분한 어린이날을 보내야했던 봉규.
사건이 발생했던 3일 아침 아빠는 출근하면서 『올 어린이날에는 아무리 바빠도 엄마와 함께 금강원으로 놀러가겠다』며 대문을 나섰다.
그러나 아빠는 이날 오후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아빠의 시신 앞에서도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철없이 굴었던 봉규는 어린이 날인 5일 아침에야 비로소 아빠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이날 아침 봉규에게는 2학년2반 학부모와 아빠의 동료들이 마련한 학용품등 푸짐한 어린이 날 선물이 전달됐다.
『선물로 주신 크레파스로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고 일기장엔 아버지의 얘기를 적겠어요…』
아버지의 영정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작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봉규는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지요. 옳은 주장은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정의감도 강하지요』
담임 이일영교사(50)는 『아버지의 죽음이 어린 가슴에 상처를 주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봉규의 꿈은 「대학생들의 데모를 막는 경찰관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커서 경찰이 될꺼야, 그리고 대학생들의 데모를 막는데 앞장설거야』
입술을 깨물며 내뱉는 야무진 다짐이 칼날처럼 가슴을 쳤다.
그것은 한풀이를 위한 꿈이 아닐까.
철없는 어린 가슴에까지도 한의 응어리를 남겨주는 이 시대의 어둠은 언제쯤 걷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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