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담꾼 성석제 “조상들 얘기가 나의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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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장편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펴낸 소설가 성석제. 작가의 거침 없는 입담이 펼쳐지는 이 작품은 분량이 원고지 3000매에 달한다. 성 작가는 ’무명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역사 소설을 쓰고 싶었다. 앞으로도 작업은 계속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5년 만에 장편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펴낸 소설가 성석제. 작가의 거침 없는 입담이 펼쳐지는 이 작품은 분량이 원고지 3000매에 달한다. 성 작가는 ’무명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역사 소설을 쓰고 싶었다. 앞으로도 작업은 계속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지금까지 쓴 소설 중에 가장 긴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데, 워낙 복잡한 시대라 최소한의 설명을 하다 보니 길어졌네요. 그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썼습니다.”

5년 만의 장편 『왕은 안녕하시다』 #조선 숙종과 의형제의 활극 다뤄 #“조선시대 개인이 부각되던 시기” #1인칭 시점에서 해학·풍자 발산 #문단에서 소문난 부지런한 작가 #“길가다 적으면 모든 곳이 작업실” #고구려 승마기술 소재 신작 준비

소설가 성석제(59)가 5년 만에 두 권짜리 장편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문학동네)를 펴냈다. 조선 숙종 시절 내키는 대로 살던 파락호 ‘성형(成衡)’이 우연히 세자 이순(숙종)과 의형제를 맺으며 벌어지는 활극을 그린 작품이다.

조선 숙종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

조선 숙종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

성형은 왕위를 위협받는 숙종의 곁을 지키며 『구운몽』을 쓴 작가 김만중, 훗날 ‘장희빈’으로 불리는 장옥정 등과 만난다. 작가는 궁궐 안팎을 오가는 성형의 시선을 통해 왕을 둘러싼 치열한 권력 다툼은 물론 보통 백성들의 삶 등이 당대 정세와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번 작품은 2003년 장편 『인간의 힘』, 2006년 단편 ‘집필자는 나오라’에 이은 성석제의 세 번째 역사 소설이다. 작가는 “앞서 내가 썼던 역사 소설 주인공들이 한 작품에서 만난다면 어떨까 했다. 이번 작품이 그 결과물”이라며 “역사라는 1%의 뼈대 위에 99%의 허구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금으로 치면 순도 1%”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역사의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우며 ‘낄낄’ 웃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원고료만 나오면 글 쓰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그는 이번 소설도 신나게 써내려갔다.

특히 주인공 성형은 소설의 화자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생생하게 전달하는데, 그의 어투엔 성석제 특유의 풍자와 해학이 진하게 녹아 있다. 작가는 “1인칭 소설을 쓰다 보니 주인공에 내 기질을 투영하게 되더라. 주인공의 자유로우면서도 게으르고 낙천적인 성향은 나를 닮았다”고 했다.

소설의 배경이 된 숙종 시대는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의 무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장희빈보다는 송시열·윤휴·박태보 등 사대부의 행적을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당시의 경제, 군사 제도에도 주목했다.

“숙종 때는 조선 시대에서 격동의 시대이면서 ‘개인’이라는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입니다. 사회 변화도 많았고요. 정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연재해도 잦아 백성이 어려움을 겪은 시기였지만, 화폐경제와 무역이 발달한 시대였죠.”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 성석제가 10일 한국기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상조 기자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 성석제가 10일 한국기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상조 기자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유머 코드’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천성에서 연유한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유머를 간절히 추구해온 노력의 결과물인지 궁금했다. 작가는 “소설은 무겁고 진지하기보단 재밌어야 한다”며 “현실이 무거운데 소설까지 그럴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이어 “글로 웃긴다는 것은 문장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라 개그맨처럼 말로 웃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며 “나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가 재미없다고 말한다”며 웃었다.

쉼 없이 글을 쓰는 그는 문단에서 ‘농부 작가’로 통한다. 창작의 원동력을 묻자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한 작품을 마치고 나면 별스럽지 않게 다른 작품을 쓰게 된다”며 “농부들이 겨울에 잠시 쉬고 봄 되면 씨앗을 뿌리듯 일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작업실도 따로 없다. 길 가다가 글을 적을 수 있는 모든 곳이 그의 작업 공간이다. 성석제는 “일을 할 만한 에너지를 주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일한다. 최근에는 약간의 소음이 있는 커피숍에서 글이 잘 써진다. 오히려 조용하고 한적한 집에서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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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책이 나왔건만 그는 벌써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사소설이다. 고구려에서 시작한 승마기술인 ‘박차(拍車)’가 주요 소재다. 이토록 역사 소설에 심취해 있는 이유가 뭘까.

“역사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역사 그 자체가 된 무명 또는 익명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악습을 무너뜨리고 불합리한 체제에 균열을 낸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스스로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줬는데, 그 후손이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이거든요. 결국 내가 쓰고자 하는 소설은 나, 또는 우리 조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독학으로 바둑 아마 5단…바둑소설은 쓰지 않을 것

소설가 성석제는 바둑 고수로도 유명하다. 기력은 아마추어 5단. 어린 시절 우연히 바둑의 재미를 알게 됐고, 중학교 시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바둑책을 긁어모아 독학으로 연마했다.

기풍을 묻자 자신의 바둑은 너무 저돌적이라 일명 ‘돌 바둑’으로 불린다고 했다. “정석에도 없는 이상한 수를 무식하게 두어가는 스타일”이란다.

소설 쓰기와 바둑 두기 중 어느 것이 더 재밌냐고 묻자 그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둑’이라고 답했다. 그는 “바둑은 판을 머릿속으로 읽고 최선의 수를 찾는 과정이다. 연역적인 수읽기 과정이 두뇌에 쾌감을 주는 것 같다. 게다가 승패 같은 보상체계도 있어서 사람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평생 좋아하는 프로기사는 조훈현 9단. 요즘엔 최정 9단과 오유진 6단 등 여자 기사들에 푹 빠져있다. “바둑이 화끈하고 직선적이라 관전의 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앞으로 바둑 관련 소설을 써볼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내가 바둑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편파적이 될 것 같아서 쓰지 않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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