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 각별히 신경을" 여당 주문에 전격 취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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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얼굴) 대통령의 21일 임시국회 연설 취소를 놓고 여권 내 기류가 미묘하다. 청와대든 열린우리당이든 언급 자체를 피하는 분위기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은 "당에서 요청한 것도 아니고 청와대에서 하겠다고 나선 연설을 스스로 취소한 배경이 뭐냐"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4일 청와대에서 연설 취소 통보를 받은 김한길 원내대표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슨 일이야. 대통령이 당에 불편한 일이 있으신가"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은 주요 입법과 관련, 국회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연설을 추진했으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 양당 정책협의회에서 6월 임시국회 법안 처리에 대한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당초 연설 취지가 사라졌기 때문에 국회 연설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배경을 밝혔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안에서 이런 청와대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 고위 관계자는 "여야 정책협의회에서 구체적으로 합의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국회 연설 취소는 어떻게 된 사연일까. 노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 결정됐을 때 가장 긴장했던 쪽은 사실 열린우리당이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당.청 갈등이 불거졌다. '선거 한두 번 졌다고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 '저항 없는 개혁은 없다'는 등의 대통령 발언이 갈등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게 여당의 불만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이 국회에서 직접 연설을 하겠다고 나서니 열린우리당이 긴장한 것이다. 당은 연설 내용을 놓고 이리저리 안테나를 세웠다. 당에서 파악한 노 대통령의 국회 연설 요지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우선 지방선거 참패에 대한 솔직한 심경이다. 둘째가 사법개혁과 국방개혁을 위한 국회의 협조 당부다. 마지막이 향후 흔들림 없는 국정운영 기조와 개혁의지다. 여권 핵심 인사는 "참여정부의 '중단없는 개혁의지'가 국회에서 직접 노 대통령의 입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될 경우 '서민 경제 살리기'로 새 출발을 약속한 김근태 의장의 열린우리당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런 여당의 우려와 고민은 13일 청와대에 전달됐다. 당을 찾은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김근태 의장은 "21일로 예정된 노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 각별히 신경 써 줬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의원들이 대통령 연설에 주목하는 것 같고, 국민도 관심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당 관계자는 "표현은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아도 당.청 갈등으로 시끄러운데 대통령이 말 조심을 해 줬으면 한다'는 뜻이 강했다"고 전했다.

14일 이병완 비서실장은 몇몇 청와대 수석과 회의를 하고 노 대통령에게 '연설 취소'를 건의했고, 수용됐다. 이 실장은 이 사실을 열린우리당 김 원내대표와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에게 전화로 전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청와대.열린우리당 주변에서는 한때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이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향후 당.청 관계, 나아가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당적 유지 문제까지로 연결될 수도 있다.

여권 핵심 인사는 "계류 중인 개혁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는 당.청 갈등이 최대한 억제되겠지만 그 이후는 노 대통령이 여당과의 관계를 놓고 깊은 고민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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