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성공적 FTA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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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본협상이 비교적 순조로운 첫걸음을 내디뎠다니 다행이다. 아마도 서로의 입장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첫 만남의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미국 워싱턴 현지에서 큰 마찰 없이 입장 표명을 한 것도 다행스럽다.

한.미 FTA와 관련해 그동안 있었던 국내의 논란과 또 향후 예정돼 있는 협상을 감안할 때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하나는 어떤 협상 결과가 '잘된' 것인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부터라도 한.미 FTA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추진했던 개방 협상은 거의 예외 없이 많은 예외 조항을 두었다. 그런데도 수입 개방에 의한 피해가 예상되는 부문에 대해서는 정부 재정에 압박을 줄 정도로 상당한 지원과 피해대책을 마련했다. 수입품과 직접 경쟁해야 하는 취약한 부문을 배려한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협상과 대책은 상대국 시장은 별로 열지 못하면서 너무 비싼 비용을 지급하는 셈이다. 한.미 FTA 협상도 이 같은 양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협상을 추진하는 주무 부처의 담당자들은 "우리의 민감 부문에 대한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FTA 협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내 피해에 대해 보상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유무역 협상은 본래 서로 상대국의 시장을 열기 위해 한다는 점이다. 서로가 시장을 열자고 모인 협상 자리에 자국 시장의 상당한 부분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나서는 것은 협상의 본뜻에 어긋난다. 상대방에게도 그만큼 시장개방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의사표시가 된다는 얘기다. 협상 참여자들이 각자의 시장을 열지 않는 데 집착한다면 처음부터 FTA 협상은 무의미해진다.

수입 경쟁에 의해 구조조정의 압박을 받는 부문에 대한 정부 지원도 마찬가지다. FTA를 체결하려는 이유는, 개방을 통해 경제구조를 경쟁력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비경쟁 부문에서 낭비되고 있는 자원을 좀 더 쓰임새 있는 쪽으로 옮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정부 지원이 지나쳐 수입품과 경쟁해야 할 부문이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거나, 재정에 압박을 줄 정도로 재정의 부담이 예상된다면, 왜 이런 '비싼' 대가를 치르고 FTA 협상을 추진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나라 전체로 이득이 기대되기 때문에 FTA 협상을 추진한다면, 적어도 협상에 나가는 당국자는 "가급적 우리의 개방 폭을 넓히겠다" 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상대편에게 더 강하게 개방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국내 부문별 담당부처는 "가급적 정부 지원을 늘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미 FTA 협상이 상호손실(lose-lose) 게임이 아니라 상호이득(win-win)의 게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이런 각오와 다짐을 할 수 있으려면 국내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그만큼 '대내협상'에는 대외협상에 못지않은, 또는 그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는 아직은 그만한 국내적 합의와 지지가 없다는 점이다. 협상에 나가기 전에 당연히 했어야 할 관련 부문과의 긴밀한 입장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청회도 열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단도 활용했다지만, 관련 부문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할 기회가 충분치 않았고, 대책이 미흡하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대외협상에 나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뼈저리게 느끼듯이, 대외협상에서의 힘은 바로 대내협상을 바탕으로 한 국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김정수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