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 운동 70돌 맞아 재조명|김규식 좌우합작 주창한 중도우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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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리 조선사람은 과거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남에게 정복당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내가 나를 정복합시다. 김 주석이 김 주석 자신을 정복해야 할 것이며 이승만 박사는 이승만 박사 자신을 정복할 것입니다. 김규식은 김규식 자신을 정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각자를 정복하는 날 비로소 미군은「굿 바이」인사하고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도「더 스비다니 아」하고 물러갈 것입니다….』
이 인용문은 고국을 떠난 지 32년만에 해방을 맞아 귀국한 우사 김규식이 귀국 직후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임시정부요인 환영대회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다.
고아로 자라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고 평생의 절반을 해외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바친 김규식의 삶은 북한의 압록강 주변 만포 진에서 외롭게 막을 내렸다(1950년 12월10일 전후).
김규식의 삶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통일되어 온 민족이 행복을 누리는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몸바쳐 온 선열들의 실존적 전형이다.
그러나 모든 실존적 삶의 종말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법. 우사 김규식은 우리 민족과 함께 비극적으로 살다 갔다.
앞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 김규식은 강한 자주의식을 가진 중도적 입장의 정치인이었다. 어쩌면 그는 남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정치노선, 끝없는 대화와 통합노력을 전개한 중도적 정치가인 그는 46년 2월 성립된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부의장에 취임하면서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정계의 제1인자로 대우받는다.
그러한 미군정 당국의 지원 하에 당시 극단적 대결양상을 심화시켜 가던 좌익과 우익의 합작을 추진했다. 우사는 이 합작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 남-북한을 따로 점령한 채 서로 한반도에 수립될 정부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기반을 만들려던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정국에서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규식은 좌·우익 합작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나섰다. 가능성은 적지만 그 길만이 통일된 독립국가의 수립을 달성하는 유일한 통로라 믿었기 때문일까.
우사의 이런 선택에서 앞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자기 정복의 의미가 되살려 진다.
이후 해방정국은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 주장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가능성은 점차 엷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민족분열과 동족상잔을 예견케 하는 이런 상황에서 김규식은 남-북 협상을 제시한다.
절망적 상황이 낳은 양심의 일깨움은 당시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김 구·조소앙등 민족지도자들의「자기 정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당시 칼자루를 쥐었던 미소는 이러한 민족 진영과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를 냉대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버린 것이었다.
48년 5월10일 남한에서는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모친도 김규식이 6세 되던 해 죽었다.
이후「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성장한 우사는 미국유학을 통해 정치인으로, 외 교가로, 독립운동가로 성장한다.
1919년 상해 임정에 외무총장으로 참여하면서 우사는 32년여에 걸친 천로 역정의 독립외교활동을 전개한다. 파리 강화회의 참석, 워싱턴 구미위원회 위원장, 이르쿠츠크 동방 피 압박민족연합회 회장, 남경 임정 국무위원, 중경 임정 부주석으로 활약하는 등 세계 어느 곳에도 한국독립을 위한 일이 있는 곳이라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평생을 통해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다. 구미 위원회 위원장 시절에는 뇌수술을 받기도 했고 해방 정국 때는 심장병과 심한 천식으로 고통을 받았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을 위해, 통일조국의 건설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다했던 그는 1950년 납북, 쓸쓸히 숨을 거뒀다.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을 폈던 김순애 여사는 76년 89세로 별세했다. 또 장남 김진동씨(80세), 2남 김진세씨(60세), 장녀 김우애씨(64세), 장손 김건필씨는 모두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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