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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의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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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대형 항공기 사고가 날 때마다 등장하는 ‘통계적 사실’이 있다. “그래도 비행기가 교통수단 중 가장 안전하다. 비행기가 위험하다는 것은 한꺼번에 대량 사망자가 발생하는 데 따른 착시일 뿐이다.” 상식의 허를 찌르는 의외성에 눈길이 가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준을 여행 거리로 놓으면 맞다. 비행기 사고 사망자는 10억㎞당 0.05명으로 버스·기차·선박·자동차보다 훨씬 적다. 그러나 이용객 수를 기준으로 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이용객 10억 명당 사망자는 버스 4.3명, 자동차 40명인 데 비해 비행기는 117명이다(영국 ‘모던레일웨이’ 2000년 통계).

보고 싶은 것만 봐서야 #정책 오류 고칠 길 없어

통계는 속기 쉽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도 그렇다. 현대 통계에서 조사 방법과 오차 범위를 강조하는 이유다. 비행기 사고 사망자 수처럼 ‘요건 몰랐지’ 하는 식의 통계가 더 위험하다. 반전의 재미나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위해 슬쩍 기준을 흐리기 쉽기 때문이다. “어림수는 항상 속임수다.” 18세기 영국 문학가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통계 오(誤)인용 논란이 잦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 효과 90%’ 발언이 대표적이었다. 지난해에는 직접 사망자 ‘0’명인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사망자를 1368명이라고 해 외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조선과 자동차 산업이 살아나고 있다’며 근거로 든 통계가 문제가 됐다.

조선 업황이 개선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기껏해야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 온 수준이다. 올해 선박 수주가 지난해보다 늘었다고는 하지만 과거 호황 때의 20% 수준이다. 이마저 세계 경제가 본격 긴축 모드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다. 3분기 현대차 영업이익은 지난해에 비해 반의 반 토막이 났다. 부품업계는 아예 생존을 걱정하고 있다. 통계 칼럼니스트 대럴 허프는 통계에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면 의심해 보라’고 했다. 온통 가라앉고 있는 수치 가운데 반짝 치솟은 그래프가 반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 분위기를 조금만 알았다면 ‘물 들어올 때’라는 말은 안 나왔을 성싶다.

통계 오독(誤讀)이 지적 능력이나 성실성 부족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다. 책상 위에 올라온 보고서는 꼼꼼히 다 읽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그래서 청와대 참모진의 고민 중 하나가 불요불급한 보고서는 핵심만 추려 간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상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報告)하는 참모가 없으란 법 없다. 그렇지 않다면 빈번한 대통령의 ‘통계 헛발질’을 설명할 길 없다. 첫눈 오면 내보내야 할 참모가 이벤트에 능하다는 모 행정관뿐만은 아닌 듯싶다.

‘백의의 천사’라는 나이팅게일은 이미지와 달리 통계 전문가였다.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기도 하다. 크림 전쟁 야전 병원에서는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는 병원 내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훨씬 많았다. 나이팅게일은 본국인 영국 정치인들에게 이런 사실을 일목요연한 통계 도표로 설득해 예산을 따냈다. 야전 병원 환경이 좋아지면서 사망률은 40%에서 2%로 떨어졌다. 개혁이 선의와 헌신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통계 오독과 분식(粉飾)의 유혹은 강해진다. 어려워진 현실이 무리한 정책의 부작용 때문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수록 더 그렇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마저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고용과 성장에 부담된다”고 충고하는 마당인데 청와대는 “정책 변화는 없다”고 일축했다. 언제까지 더 ‘기발한 통계’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