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그러나 푹 삭힌 삶의 속내 … 등단 25년째 이혜경, 소설집 '틈새' 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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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작가는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남들 얘기할 때 그저 묵묵히 듣고 앉아있다. 가끔, 아주 가끔 수줍은 얼굴로 한두 마디 거들 뿐이다. 어렵사리 꺼내놓은 말도, 느릿느릿, 때로는 더듬더듬, 잔뜩 익히고 삭히고 난 다음의 것들이다.

이혜경(45.사진). 등단 25년째인 중견 작가다. 발표 작품은 많지 않다. 장편 한 권과 이번 단편집 '틈새'(창비)를 포함해 세 권의 단편집이 전부다. 느린 말처럼 글 쓰는 속도도 느리다. 등단만 빨랐지 나머진 다 느리다.

소설도 꼭 그렇다. 소설은 꼼꼼하고 치밀한 문장으로 꽉 차 있다. 어디 하나 허술한 구석이 없다. 언뜻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인 듯싶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등장인물들은 서로 으르렁거리고 저마다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산다. 따지고 보면, 소설 속 삶만 소설 같은 건 아닐 터이다.

단편 '피아간(彼我間)'을 보자. 주인공 경은은 만삭이다. 결혼 7년 만에 얻은 아기인지라 매사가 조심스럽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갔더니 새어머니 서령댁은 자신에게 유산을 남겨달라는 유언을 독촉하고 있다. 평소 아버지에 소원했던 오빠하고도 한 판 붙는다. 여기까진 예의 익숙한 가족소설의 얼개다.

그러나 막판 반전이 있다. 돌아간 아버지를 묻으러 야산을 오르는 도중 휴대전화가 울린다. 이 대목의 문장 몇 줄을 옮긴다. '치마를 들추고 꺼내던 휴대폰이 그만 미끄러진다. 몸을 구부려 휴대폰을 집어들면서 경은은 아차, 싶어진다. 무릎을 이렇게 날렵하게 접는 게 아닌데'(158쪽). 그렇다. 경은은 임신한 게 아니었다. 불임이란 걸 알고서 은밀히 아기를 입양하기로 한 것이었다. 임신과 관련한 모든 디테일은 경은의 연기였다.

책에 실린 단편 9편은 하나같이 촘촘하다. 문체나 구성 모두 튼튼하고 모범적이다. 오늘의 작가상.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이수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을 섭렵한 건,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발표할 때마다 숙성된 작품을 내놓는 작가는 많지 않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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