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4강 신화는 잊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국은 홈그라운드의 이점, 히딩크 감독, 그리고 이변의 가능성 등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빠진 상태에서 독일을 향한다."(AP통신)

"브라질은 위대한 팀이다. 그러나 조별 리그에서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월드컵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 신동 리오넬 메시)

독일 월드컵 개막이 이제 보름도 남지 않았다. '4강 신화'의 감동을 안고 한국 축구대표팀이 27일 장도에 오른다. 이번에도 훌륭한 플레이와 좋은 성적으로 국민을 기쁘게 해 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그전에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한국 국민은 16강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여러 조사를 종합해 보면 국민의 90% 정도가 16강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16강 진출에 실패한다고 보는 사람은 4~5%에 불과하다.

근거는 무엇인가. 4년 전보다 실력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유럽에 진출한 선수도 많고 월드컵을 경험해 본 선수도 많다. 전 대회에서 4강에 올랐으니 아무리 원정 경기라 해도 16강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팀인 프랑스는 2002년 대회에서 1무2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한국은 아직 원정 경기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는 이천수 선수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홈 경기와 원정 경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특히 유럽 원정은 다른 원정과 또 다르다.

지금까지 17차례 월드컵 중 유럽에서 벌어진 대회는 9차례다. 이 중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럽팀이 우승했다. 다섯 차례나 우승한 브라질이 58년 스웨덴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유일하다. 그것은 유럽연합(EU)이 상징하듯 유럽은 '하나의 나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은 네덜란드와 마르세유에서 조별리그 2차전을 치렀다. 마르세유는 경기 전날부터 '오렌지색'에 점령당했다. 그곳은 프랑스 마르세유가 아니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었다. 2002년 당시 한국과 상대한 팀들도 경기장을 가득 채운 붉은 함성과 열기에 주눅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독일에서 대회가 벌어지지만 프랑스와 스위스에는 홈 경기나 마찬가지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단순히 심판 판정의 유리함 정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독일 월드컵 목표는 16강 이전에 '원정 첫 승'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이 시점에서 '4강 신화'는 잠시 잊는 게 좋다.

한국이 스포츠에서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는 양궁.태권도.쇼트트랙 스케이팅 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것이다. 1등, 금메달을 국민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은메달을 따도 욕을 먹게 돼 있다.

"그럼 너는 한국이 16강에 못 간다는 거냐" "월드컵 열기에 재를 뿌리는 거냐"하고 반문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 천만, 만만의 말씀이다. 꿈과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월드컵은 축제이므로. 월드컵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니까.

다만, 뜨거운 가슴으로 응원하되 머리까지 뜨거워지지는 말자는 말이다.

손장환 스포츠부문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