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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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공인이란 공적인 책임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공인으로 행세하려면 적어도 몇 가지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 요즘 국회 청문회에 등장한 인사들의 언행을 보면 그것을 역연히 알 수 있다.
첫째 무 소신. 자신의 공적인 행위는 신념이나 확고한 철학의 소견이어서는 안되고, 시류에 따르는 것이 상책이다. 그때는 그랬을지라도 지금 세상이 바뀌었으면 재빨리 오늘의 시속에 따르는 순발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공인으로 살아 남으려면 적어도 시침 뚝 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무쇠심장을 지녀야 한다.
둘째 무책임. 어떤 문제의 결정은 될수록 친필의 사인보다는 도장을 찍는 것이 나중에 책임회피를 위해 좋다. 설령 사인을 했더라도 기억이 갈 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변죽을 가져야한다. 또 중요 문제의 결정은 혼자서 하기보다는 여럿이 하는 편이 유리하다. 여차할 때 책임을 다른 데로 떠넘길 수 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분명히 자기 의사는 접어두는 것이 뒤탈이 없다.
셋째 무 의리. 의리를 위해 죽고 사는 것은 옛날 농경사회나 가부장적 권위와 윤리가 통하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적자생존의 시대이며 세상도 복잡다단하다. 의리를 존중하다가는 전천후의 생존기회가 보장되지 않는다.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한다. 남은 나중의 일이다.
한 시절 어깨에 별이 번쩍번쩍하던 사람도 청문회에서 보는 면모는 그렇게 비굴하고 무력해 보일 수가 없다. 공석에서 떵떵거릴 때는 풍채도 좋고 말 또한 번드르르하던 사람들도 청문회자리에 오르면 먼저 나 살 궁리에 골몰한다. 예외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멀쩡한 사람의 바보행세도 볼만하고, 궤변 잘하는 사람을 보면 출세의 비결은 먼저 얼굴부터 두꺼워야 한다는 교훈을 찾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좌지우지하는 세상에 살아온 국민외 신세가 가련해 보일 뿐이다.
공자는 군자를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었다. 『군자모도, 부모식』-, 군자는 도를 위해 노력하고, 먹을 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도란 의와 예와 겸손, 그러고 신의를 갖춘 사람이 가는 길이다.
요즘 국회 청문회가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이 하나 있다면 군자 닮은 공인은 과연 몇이나 꼽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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