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벌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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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속담에 『용 못된 이무기 방천낸다』는 말이 있다. 옛날 설화에 따르면 이무기는 개천에서 천년은 더 살아야 용이 된다. 심술이 나 방천낼 만도 하다.
용이 못되면 벌레가 된다는 얘기는 요즘 처음 듣는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중국계 신만보라는 신문이 최근 전두환씨 비리로 빚어진 우리나라의 혼란을 놓고 그렇게 보도했다. 「아시아의 4마리 용」가운데 하나인 한국은 이대로 가면 벌레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바다 멀리에선 우리나라가 그정도의 위기로 비치는 모양이다.
바로 며칠 전 대만출신의 미래학자 사세휘 박사는 서울에서 강연회를 갖고 향후 10년 안에 한국은 세계 9대 경제강국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인당 GNP에선 2010∼2015년 사이 한국은 일본을 앞지를 것이라는 말도 했다. 2010년은 불과 20년 후의 일이다.
꼭 우리 나라를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가 「A·토인비」박사도 환태평양시대를 예언한 일이 있다. 그는 세계의 역사를 동서의 순환으로 보며 인류역사이래 5백년의 주기를 두고 번영의 파도가 동서로 오고 가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시대에서 수·당의 시대로, 다시 유럽의 시대로, 이제는 그 시대의 진련이 환태평양쪽으로 옮겨오고 있다고 했다.
사 박사는 2015년께엔 일본·중국·한국·대만의 GNP를 합치면 세계 GNP의 41% 비중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렇게만 된다면 동양의 시대임엔 틀림없다.
문제는 우리 나라도 그런 역사의 순환 속에 끼어들 수 있느냐 하는데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런 시대를 주도해 가야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를 우울하게만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정치는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의기를 빼앗아가고 있다. 이 시대를 이끌어갈 인물도 없어 보이고, 그런 시대정신에 투철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용이 되어 하늘로 솟구칠 기회가 와도 그것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남보기에도 오죽 딱하면 용이 벌레가 되어간다는 소리를 듣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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