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북한에 '많은 양보' 하겠다는 노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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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선 남북 정상회담이다. 지난해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에 유효하지 않으면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언제.어디서 무슨 내용을 얘기해도 좋으니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수십 번 얘기했다"면서 '북핵 해결'의 전제를 없앴다. 여기에 '조건 없는 제도적.물질적 지원' 등 북한이 혹할 만한 내용을 추가했다. 매년 북한에 막대한 지원을 하는 남측 대통령이 북측 지도자에게 '따지지 않고 더 많이 도와줄 테니 한번 만나자'고 애걸하는 꼴이 된 것이다.

"남북관계가 이만큼 좋은 적이 있었느냐"며 자랑을 한 게 이 정부다. 북핵 문제 논의도 북.미 갈등으로 정체된 상태다. 북한 내부 사정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정했던 정상회담의 원칙을 아무런 배경설명 없이 스스로 무너뜨린다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 이러니 '북한과 모종의 합의를 해 판을 바꾸려 하는 등의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다'는 각종 해석이 분분히 나오는 것이다.

"미국과 주변국들과의 관계 때문에 정부가 선뜻 할 수 없는 일을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길을 잘 열어주면 저도 슬그머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급도 원칙 부재의 전형이다. 정부는 DJ 방북은 '개인 차원'이라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사실상 '정부 특사'로 간주한다는 얘기다. 가뜩이나 DJ의 방북을 놓고 의구심이 일고 있는 마당에 대통령마저 나서 이런 언급을 하니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의아한 것은 "북한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며 조건 없이 제도적.물질적 지원을 하겠다"는 발언이다. 우리는 인도적 대북 지원은 가능한 한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호한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제도적'지원이라는 게 무엇인가. 이것이 만약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하는 한.미 군사훈련 축소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수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미국과는 '다른 길'을 가면서 남북 정상회담에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불투명하고 미국과의 갈등만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추진돼선 안 된다. 남북관계 개선은커녕 혼란만 자초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신중한 판단을 거듭 촉구한다.